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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여적]동성부부 마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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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나온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각자 자기 일을 잘하며 혼자 잘 살아온 두 여성이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동거인’으로 살림을 꾸리는 이야기다. 아예 장기전을 계획하고 공동명의로 집을 샀다. 여자 둘과 고양이 네 마리가 꾸려간다는 의미로, 분자식 ‘W2C4’의 ‘분자가족’, 혹은 ‘조립식 가족’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독자들이 열광했다. 출간 이틀 만에 3쇄를 찍더니 최근 예스24가 진행한 올해의 책 24권 중 하나에 뽑혔다.

민법 제779조는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또는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라고 규정한다. 피가 섞였거나 결혼으로 맺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1인 가구와 비혼인구 급증으로, 직계가족이 아니어도 가족만큼 친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반면 현실에선 ‘법적 가족’만 인정받는 영역들이 많다. 법적 보호자 사인 없이는 수술을 할 수 없고, 주택제도의 혜택, 보험사의 피부양자 자격, 소소하게는 통신사 가족할인도 동거인에겐 비켜간다. 외국에선 이미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 팍스(PACS) 제도, 미국의 지역 파트너십 제도 등 동거인이 배우자에 준하는 권리와 책임을 갖게 하는 선례들이 자리잡았다. 한국은 2014년 진선미 의원이 ‘생활동반자법’ 발의를 여러 번 시도했으나 발의조차 모두 무산된 상황이다.

대한항공이 최근 캐나다에서 혼인신고한 한국 국적의 동성부부가 마일리지를 합산할 수 있도록 ‘가족 등록’을 해줬다. 대한항공 측은 “1990년 마일리지 가족합산제 시행 시점부터 개인의 성을 구분하는 별도 규정이 없었고, 각 국가의 관련 법에 근거하여 가족관계를 인정하고, 관련 서류만 갖추고 있으면 가족 등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해당 동성부부는 한국 국적이지만, 미국 영주권자로 미국에 살고 있고, 캐나다에서 받은 혼인증명서와 미국에서 발행한 부부합산 세금증명서도 함께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적으로는 그토록 굳게 잠겼던 빗장이 실용적인 영역에서, 아주 우연히 스르르 풀렸다. 새로운 큰 물결의 시작일지 모른다.

송현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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