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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서울 옆에 사는 북한산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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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 짙은 그늘 속 문인의 향기 / 버거운 삶의 든든한 안식처 역할

북한산은 옛날에 삼각산이라고 했다던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세 뿔 같은 봉우리 때문에 그렇게도 불렀다나. 몇 년 동안 북한산을 몇 번이나 찾았던가.

한 10년 전, 그때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생각할 때 마침 어느 선배가 이 산을 알려줬다. 손수 이끌고 오르기도 했다. 세상은 누군가 끌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리라.

세계일보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구기터널 앞에 편의점 하나가 있다. 그 앞에 등산복 차림 사내들이 서성이거나 앉아 있으면 두말할 것 없이 북한산 등반객이다. 아스팔트 걷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데, 사실 그쪽 북한산 초입은 아스팔트 길이다. 처음 그 초입 길 오를 때는 200∼300m도 못 가 지쳐버리고 말았다.

차차 나아졌다. 아무리 멀어 보이는 산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곧 맞아준다. 구기터널 앞 이북5도청 가는 쪽에서 들어가 북한산성 대동문 있는 곳으로 가는 등반길은 이 산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길, 숨 깔딱거리기를 몇 고비를 넘어서야 대동문에 이르는데, 그것도 몇 번 만에 익숙해짐을 느낀다.

이 선배와 후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다. 이 얘기 저 얘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르다 보면 첫째 효능은 몸보다 마음부터 평온해지는 것이다. 선배는 나이 선배가 아니요, 인생의 선배임을 그때 새삼 절실히 느꼈다.

산에 점차 익숙해지자 꼭 셋이 아니라도 산을 찾게 됐다. 일부러 쉬운 길, 초입은 같아도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을 택해 승가사 거쳐 사모바위 오르는 쪽으로 향한다. 쉬워도 이렇게 쉬운 북한산 길은 없다. 애써 발 디딜 곳 찾지 않아도 저절로 걸음은 위를 향한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점심 때 쯤 시간 맞춰 오르면 1000원, 2000원에 절밥 공양까지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이 북한산 하면 나는 두 사람의 문학인을 떠올린다. 하나는 정릉 살며 지난해던가 큰 수술 치른 신경림 시인, 다른 하나는 일산의 ‘바퀴’ 운전사 시인 모모다.

신경림 선생의 북한산 등산 이력은 30년은 족히 넘을 것이니, 나도 딱 한 번 선생이 문학적 ‘동반자’ 몇 분과 함께 산중에 계신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금방 내가 모모라 한 또 한 시인은 이 신경림 시인의 뒤를 이어야 할 북한산 문인 산지기쯤 된다.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 산속으로 들어간 사람 중 30%는 아파서 간 사람이요, 또 30%는 경제 때문에 간 사람, 나머지 30%가 기타 제각각 이유의 사람이다. 이 모모 시인의 ‘등산 수행’은 그렇다면 두 번째일 것이다. 그는 출판사에 다니다 그만 ‘바퀴’를 굴려야 했고, 버티려면 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가 내게 선사한 근래 몇 년 사이의 가장 큰 선물은 북한산의 ‘숨은 벽’을 가르쳐 준 것이다. ‘숨은 벽’은 보통 명사 아닌 고유 명사,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에 바깥에서는 안 보이는 바위벽이 있어 사람들은 이 바위를 ‘숨은 벽’이라 부른다. 나는 이 ‘숨은 벽’을 알 듯 말 듯한 뜻이 좋아 혼자 그 벽을 찾아본 적도 있다. 그러나 ‘숨은 벽’은 우리 두 사람만의 ‘숨은 벽’이 아니었다. 산을 찾는 시인 누구나 이 벽을 탐내 시를 쓰고 시집 제목을 삼으려는 것이리라.

초겨울 쌀쌀한 날, 나는 이 친구가 가르쳐 준 또 하나의 길 진관사 계곡을 찾아간다. 비구니 스님이 있는 곳, 예전에 작가 채만식 딸이 있다 했던 곳, 봄이면 계곡 위 진달래꽃이 슬쓸하고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는 곳이다.

오늘은 연배 높은 선배도, 모모 시인 친구도 내 곁에 없다. 몇 년 사이 진관사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나 홀로 쓸쓸히 산을 오른다. 사실은 내게 이 산길을 알려준 선배는 큰일을 치르고 있다. 부디 회복되시기를, 내게 주신 배낭을 되돌려 받으시기를. 깊은 산 짙은 그늘에 들어서면 인생이 그렇게 헛헛할 수 없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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