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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허연의 책과 지성]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190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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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선입견이란 뭘까?

선입견은 평가나 판단의 원인이 되는 지식이나 이해의 틀을 말한다. 사실 선입견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쉽사리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선입견은 한 명의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이면서도 복잡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선입견에는 좋은 선입견과 나쁜 선입견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는 효도를 해야 하는 존재라는 선입견은 좋은 선입견이다. 물론 나쁜 선입견도 무수히 많다. 특정한 인종을 폄하한다든지 하는 것이 가장 나쁜 선입견이다. 이 때문에 서양 철학의 근간인 계몽주의적 합리론에서는 선입견을 일종의 장애로 봤다.

하지만 해석학(hermeneutics)의 대가인 독일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는 선입견을 이성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인정했다. 가다머는 사람들이 가진 각기 다른 선입견들을 커다란 지평 위에 놓고 거기서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해 만들어진 것이 결국 이성이라고 봤다. 이것이 가다머가 말한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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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살아간다. 과거의 경험은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은 모여서 집단논리나 집단행동의 원인이 된다. 앞서 말한 선입견도 결국 경험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때 비판적 이성이 작동해야 한다. 수많은 경험을 꺼내놓고 질문을 던지고 토론해서 차이를 좁히고 편견이나 편향에서 벗어난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성이다.

가다머는 현재는 결국 과거의 축적이라고 봤다. 축적된 과거를 한 지평 위에 올려놓고 해석하는 것이 현대철학자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선입견을 무조건 부정하는 건 과거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봤다. 그의 대표 저서이자 철학 명저로 손꼽히는 '진리와 방법'에서 가다머는 말한다. "혁명적인 시대에는 세상 만물이 다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시대조차도 옛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보존된다. 그 옛것들은 새로운 것과 결합하여 새로운 능력을 발휘한다."

서양 철학에서 '해석'은 매우 중요한 방식이다. 서양 지성의 한 축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가다머는 이 해석의 문제를 오롯한 현대철학의 한 성역으로 격상시킨 주인공이다.

가다머는 소아마비의 몸으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등장, 냉전과 독일 통일, 유럽 통합 등 격동의 시대를 직접 경험했다. 그는 "이해(understanding)는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이해는 결국 역사적 경험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는 말일 터.

과거와 현재, 나와 타자 간 융합을 중시했던 가다머는 늘 "철학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제자들의 강의를 청강하는 등 연구자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늘 열려 있었다. 제자들이 어려운 질문을 할 때마다 가다머는 "그건 내가 잘 모르는 일"이라고 정직하게 말했다. 가다머의 강의실에 섣부른 결론은 없었다. 스승의 경험, 제자의 경험이 만났고 질문이 던져졌고 지적인 융합이 있을 뿐이었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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