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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건물에 핀 예술꽃…도시 전체가 거대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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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싱가포르 국립갤러리 앞에서 시민들이 미디어파사드 `Metapolis: City As A Canvas`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싱가포르 국립갤러리(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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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박물관 전시장 벽면에 새하얀 꽃망울이 가득한 벚나무가 서 있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리사 박의 미디어 아트 작품 '블루밍'이다. 작품에 센서가 장착돼 있어 관람객들이 손을 맞잡으면 벚꽃이 활짝 피고 서서히 붉어졌다. 가로 5.79m, 세로 3.96m 대형 스크린에 펼친 벚나무 밑에 센서가 있는 지점들이 원으로 표시돼 있다. 관람객이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올라서면 센서가 움직임을 감지해 실시간으로 벚꽃 모습과 음악을 변화시킨다. 관람객들이 손을 놓으면 벚나무는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봄의 전령사인 벚나무로 겨울철 관람객들을 홀린 이 작품은 개항(1819년) 200주년을 맞아 향후 싱가포르 200년을 전망하는 특별전시회 '2219: Futures Imagined(상상한 미래)' 출품작이다. 워싱턴 DC 카네기도서관 애플 스토어에서 애플워치로 관람객의 심박수를 측정해 추상화를 그려내는 전시 '리듬'으로 주목받았던 리사 박은 2018년 미국에서 전시한 '블루밍'을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싱가포르에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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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카메라로 AR 기술이 적용된 쿠마리 나하판 작품 `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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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예술 허브'를 지향하는 싱가포르가 움직임 감지 센서, 증강현실(AR) 등 첨단기술을 접목시킨 미디어 아트를 무기로 내세우며 맹렬한 기세로 선발주자들을 추격하고 있다. 기존 예술 분야에서는 홍콩 등에 비해 다소 뒤처져 있지만 미디어 아트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력만 있다면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는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2219: Futures Imagined'에서도 리사 박 외에 작가 28명이 사색하는 공간, 영화와 그림, 조각 등을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첨단 기술과 결합시켜 미래를 풀어놓았다.

올해 8회째인 싱가포르 예술축제 '싱가포르 아트위크'에서도 이 같은 점이 두드러진다. 프로그램 중 공공 예술 걷기 코스 '아트 트레일(AR.T Trail)'이 대표적 사례다. 현실 이미지나 배경에 가상 이미지를 입혀서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AR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다.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와 페이스북 지원을 받은 현지 AR 관련 기업 메시마인즈가 예술가들과 협업해 3개월 동안 만들었다. 페이스북 도움을 받은 공공 예술 걷기 코스로서는 싱가포르 최초다.

아트 트레일은 추아 분 키, 그레이스 탄, 로버트 자오 등 작가 6명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관람객들이 싱가포르 각지를 둘러보며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 6개를 찾아 나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차로 이동하기엔 거리가 애매해 걸어다니며 관람을 진행하는 관광객이 많다. 각각의 장소엔 전시물과 함께 QR 코드가 부착된 알림판이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해 QR 코드를 읽으면 각 작품에 맞는 페이스북 카메라가 구동된다. 이를 켠 상태로 작품을 비추면 기존 작품과는 다른 카메라 속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다. 물론 가상 이미지 없이 있는 그 자체로도 작품은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

관람객 반응은 폭발적이다. 16일에도 작품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비추고 나타나는 이미지들에 신기해하는 이들이 가는 장소마다 있었다. 미국인 관광객 피터 씨(가명)는 "스마트폰 하나만으로 전혀 다른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작품을 감상하니 보물찾기 같은 느낌도 난다"고 소감을 전했다.

17일부터 19일까지 싱가포르 국립디자인센터에서 열리는 'Atypical Singapore(별난 싱가포르) 2020'도 AR 관련 전시다. 다니엘 유, 제럴드 레우, 아만다 탄 등 주목받는 싱가포르 작가들이 조각,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아트 등과 AR 기술을 결합시켜 싱가포르 내 소수민족들의 삶에 대해 얘기한다. 올해로 네 번째인 'Light to Night Festival'은 이미 관광객과 현지인들에 사랑받는 싱가포르 아트위크의 명물이 됐다. 싱가포르 국립갤러리, 아시아 문명 박물관, 공연장 '아트하우스', 빅토리아 극장과 콘서트홀,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건물 등 외벽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대형 미디어 파사드다. 이를 위해 아티스트, 작가, 음악가, 디자이너 등 싱가포르의 예술적 역량과 기술력이 총동원된다. 이번 축제 주제는 'Invisible Cities(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다. 여러 도시들을 얘기하고 그 의미에 대해 통찰한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의 동명 소설이 모티프로, 숨겨진 싱가포르 곳곳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미다. 미디어 파사드 외에도 이를 주제로 관련 전시, 퍼포먼스 등이 낮부터 밤까지 있다.

이런 프로그램들로 가득 찬 싱가포르 아트위크는 매년 1월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 싱가포르 관광청,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올해가 8번째다. 전시, 영화, 퍼포먼스 등 100여 개 예술 관련 행사를 싱가포르 도처에서 즐길 수 있는 이 행사는 이달 11~19일에 진행된다.

한국 아티스트들도 싱가포르 아트위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사물과 예술작품의 경계를 표현한 공간 설치작품 '경사각' '부서진 기둥' '벽에 난 구멍' 등으로 알려진 허산 작가는 리사 박과 같은 전시회 '2219: Futures Imagined'에 '기둥 안의 공'을 선보였다. 가운데가 싹둑 잘린 기둥 사이로 농구공이 끼어 있는 이 작품은 건축물도 역사를 간직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해준다.

한지로 여러 조각을 감싸서 붙여 만드는 '집합' 시리즈로 유명한 전광영 작가는 2월 1일까지 '선다람 타고레 갤러리'에서 '충돌: 정보, 조화, 그리고 갈등'을 전시하고 있다. 자연을 붉게 칠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세현 작가 개인전은 '더 컬럼스 갤러리'에서 다음달 8일까지 열린다.

[싱가포르 = 서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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