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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와인’ 다시 마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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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신지민의 찌질한 와인

17. 와인을 좋아하게 만든 결정적 순간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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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인생 와인’은 무엇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단언컨대 ‘오퍼스 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와인 덕분에 나의 와인 인생이 시작됐으니까.

사회 초년생이었던 어느 겨울날, 그날 모임의 호스트는 “좋은 자리에서 고마운 분과 함께 마시고 싶어 가져왔다”며 ‘오퍼스 원’을 꺼냈다. 이 와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던 나였지만, 마시는 순간 ‘그동안 마셨던 와인은 뭐지?’라는 충격을 받았고, ‘와인은 거기서 거기고, 다 비슷하다’는 편견이 깨졌다.

이후 식당의 소믈리에는 이 와인에 대해 “중요한 계약이 성사됐을 때처럼 좋은 날 마시는 와인”이며 “굉장히 비싼 와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가격을 듣고 나니 더욱 맛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단순히 가격 때문은 아닐 거다. 오래전에 미국에서 사 온 와인을 셀러에 보관해놨다가, 좋은 날 함께 마시고 싶었다던 그분의 마음이 고마웠던 덕분일 거다.

그 뒤로 차츰 와인의 맛에 눈을 뜨게 됐을 때 프랑스 파리로 여행을 갔다.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잔 단위로 파는 프랑스는 천국이었다. 음식마다 어울리는 와인을 한잔씩 추천받아 마셨다.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데도, 좋은 음식과 만나니 환상의 궁합을 보여줬다. 그때부터 와인은 어울리는 음식과 함께할 때 더욱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행에서 돌아와 와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의 물방울>이라는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처음 나왔을 당시 몇권 읽다 관둔 책이었다. 와인 한잔을 마시고 나서, 어떤 장면이 그려지고, 어떤 음악이 들린다는 식의 묘사들이 전혀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읽으니, 달리 보였다. 이 책은 와인에 관한 상식과 정보를 충실히 전달해주고 있었고 작가의 와인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고 와인을 당장 마시고 싶게끔 만들어줬다. 이렇게 만화책으로 먼저 공부를 하고 나니 다른 책들도 눈에 들어왔고, 각종 강의도 들으러 다니면서 와인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이처럼 좋은 와인, 좋은 음식, 좋은 책을 만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좋은 와인을 마신 뒤로 와인의 맛을 깨달았고, 좋은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의 궁합을 찾으며 페어링에 재미를 붙였고, 좋은 책으로 즐겁게 공부하면서 와인 공부의 길에도 들어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의 ‘인생 와인’인 오퍼스 원을 다시 마신 적은 없다. 지금 다시 마셔도 그때의 충격과 감동은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 역시도 좋은 날, 고마운 누군가에게 ‘인생 와인’을 대접하고 싶다. 그 순간이 그의 새로운 와인 인생을 열어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문화팀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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