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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자동차 회사도 철강 회사도 "여성 이사님 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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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외이사를 찾습니다."

국내 10대 그룹의 한 인사팀 임원은 요즘 국내 주요 헤드헌터업체를 잇따라 접촉하며 '여성 사외이사'를 찾고 있다. 당장 오는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여성 사외이사를 뽑으라는 최고경영진의 지시가 내려와, 인사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이 회사의 등기 임원 9명은 모두 남성이다.

최근 국회는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 법인은 '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의 이사로 구성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자산 2조원 이상인 국내 상장사의 약 80%는 여성 이사를 단 한 명도 두지 않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재 여성 등기임원이 없는 기업은 유예기간 등을 고려할 때 2년 6개월 안에 여성 임원을 반드시 선임해야 한다.

10곳 중 8곳은 여성 임원 '0명'

기업 분석사이트 재벌닷컴은 19일 "지난해 정기 주주총회 당시 제출한 임원 명부 기준으로, 자산 총액이 2조원 이상인 상장사 143곳 중 79.7%인 114곳은 여성 등기임원이 0명"이라고 밝혔다. 등기 임원은 이사회에 참석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임원이다. 기업별로 살펴보면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은 등기 임원 전원이 남성이다. 현대차·기아차·현대제철·모비스에서 여성 등기 임원은 전무(全無)하다. 특히 기아차와 현대제철은 등기 임원뿐 아니라, 각각 171명, 170명에 달하는 미등기 임원에서도 여성을 찾을 수 없었다. LG그룹도 상황은 비슷했다. LG전자·디스플레이·화학은 물론 화장품·생활용품 회사인 LG생활건강에서도 여성 등기임원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그룹에서는 삼성물산·생명, SK그룹에서는 SK하이닉스와 SK㈜ 등도 여성 등기임원이 없었다. 포스코, 대한항공, KT 등 국내 대표 기업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조선비즈


이 기업들은 늦어도 2022년 7월까지는 여성 등기이사를 적어도 1명 확보해야 한다. 지키지 않는 기업에 대한 처벌 조항은 없지만, 재계에서는 "이 법을 어길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 재계 인사는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이사 해임 등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까지 바꿨는데, 어느 기업이 정부 눈 밖에 날 짓을 할 수 있겠나"라며 "국세청, 검찰 등에 많이 시달려온 기업들은 이번 법 통과로 정부가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이사 大亂…기업들 "당장 어디서 구하나"

갑자기 법 통과가 이뤄지자, 해당 기업들은 비상이다. 당초 개정안에는 '여성 이사제'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 조항이었는데, 막판에 "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으로 바뀌었다.

'여성 이사제'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이사회의 다양성을 통해 기업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라는 시각과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의견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4대 그룹 임원은 "이건 남성에 대한 또 다른 역차별이 될 수 있다"며 "이사회에 들어가는 이사는 그야말로 회사의 중요한 경영상 결정을 내리는 자리인데 능력이 아니라 다른 요소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법이 통과됐으니 기업들의 경우 거수기 역할을 할 수 있는 여성 임원을 골라서 이사를 시키려고 할 것"이라며 "그러면 법의 당초 취지인 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의사 결정 참여가 무색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기업이 이사를 누구로 선임하든 그것은 각 기업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지 이걸 국가가 나서서 남성 몇 명, 여성 몇 명으로 하겠다는 것은 기업의 자율성을 심하게 침해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금융위원회에서도 "입법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이사회 구성 등은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규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인센티브 부여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10대 그룹 관계자는 "미등기 임원의 경우에도 여성은 극소수이기 때문에 당장 손쉽게 충원할 수 있는 여성 사외이사 확보에 주력할 수밖에 없다"며 "이럴 경우 정부 눈치를 봐서 친정부 성향의 여성인사를 모시기 위해 경쟁하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처벌까지

반면 여성계 등에서는 경제 분야의 성 평등을 높이고, 이사회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기업 경쟁력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만큼 기업경영에 긍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 대기업 이사회 여성 비율은 3.1%로, 조사 대상 전 세계 40개국 중 '꼴찌'였다.

또 해외에서는 이사회 성별할당제를 지키지 않을 경우 상장폐지까지 가능할 정도로 글로벌 트렌드라는 주장도 있다. 여성임원할당제를 최초로 도입한 노르웨이는 이사회 인원이 9명 이상인 경우 남녀 각각 40% 이상의 이사를 두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조직개편 의무가 주어지고, 상장폐지까지 가능하다. 스페인은 40% 이상을 할당하도록 했고, 이를 준수한 기업은 정부와 계약 시 우선권을 제공하고 있다. 독일은 감독이사회(우리나라 사외이사와 비슷) 구성원 30%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캘리포니아에 주된 사무실을 둔 상장사는 여성이사를 1명 이상 뽑도록 했다. 내년 말까지는 이사회 규모가 6명 이상인 경우 3명의 여성 이사를 둬야 하며, 위반 시 벌금을 부과받을 수 있다.



신은진 기자(momof@chosun.com);김강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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