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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朝鮮칼럼 The Column] 대통령制 권력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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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뤄진 검찰 인사… 오만한 권력의 극치

민주주의 작동 기본 조건 삼권분립은 이미 뼈만 남아

대통령은 통합의 상징 아닌 분열의 중심이 됐다

조선일보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30여 년 전 우리가 민주화를 성취했을 때 그건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먼저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에서 민주화가 이뤄졌고 이는 곧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의 민주화로 이어졌다. 민주화의 물결은 한국·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 등 아시아로 넘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그 지역에서의 민주화로 이어졌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당시 자유민주주의는 세계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체제였다. 그러나 최근 민주주의 후퇴의 조짐이 곳곳에서 목도되고 있다. 러시아·터키·헝가리·폴란드 등 여러 나라에서 권위주의가 부활하고 있고, 미국·영국·독일·스웨덴과 같이 민주주의의 전통이 오래된 국가에서도 포퓰리즘이나 극단주의 정치가 부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은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박근혜 정부 때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위협받았지만 평화적 촛불집회, 국회와 헌법재판소에서의 탄핵 절차 등 헌정 체제를 통해 그 위기를 해소해냈기 때문이다. 또 이른바 '촛불 정신'을 강조해 온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와는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역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민주주의 작동의 기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은 사실상 형해화됐다. 사법부는 더 이상 독립적인 기구로 보이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예민한 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가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것 같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공정해야 할 판사들은 선거를 앞두고 곧바로 특정 정당으로 거리낌 없이 달려가고 있다.

국회는 오래전에 이미 무력화됐다. 여당은 철저하게 청와대에 복속돼 조국 사태 때조차 한마디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집권당의 전 대표는 장관으로 갔고, 전 국회의장은 국무총리가 되었다. 당도, 국회도 대통령의 권력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의사당을 버리고 거리로 나섰던 제1야당은 정부·여당을 견제할 어떤 정치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행정부는 자율성을 잃어버렸다. 정책에 대한 판단과 결정은 청와대가 하고 해당 부서는 그 지시에 대한 뒤처리만 해야 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입시 제도가 바뀌고, 충분한 논의 없이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상황에서 관료 집단의 전문성은 의미가 없어졌다. 장관 역시 별 역할이 없어졌다. 국무(國務)를 다루는 국무회의는 존재감이 없고, 청와대 '비서들'의 회의가 훨씬 더 중요해진 지 오래되었다.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은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준 이들이 낙하산으로 장악하면서 그 기관의 자율성 역시 사라졌다. 심지어 민간 기업 활동까지 청와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처럼 각 제도와 기구의 자율성, 독립성은 사라지고 대통령과 청와대만 보이는 상황이 되었다. 국가 운영이 '시스템'이 아니라 대통령과 그 주변의 몇몇 청와대 인사에 의해 이뤄지고 있고, 그런 점에서 볼 때 권력의 집중은 박근혜 정부 때보다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의 집중은 예외 없이 오만함으로 이어진다. 최근 울산시장 선거 의혹 수사와 관련하여 이뤄진 검찰 인사는 현 정부가 얼마나 권력에 도취해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세상이 대통령 1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사회도 대통령을 한가운데 두고 갈라져 버렸다. 한쪽에서는 무조건적 지지를, 다른 한쪽에서는 극단적 부정을 외치면서 대통령은 통합의 상징이 아니라 분열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 지지자 동원을 위한 정치권의 포퓰리즘이 가세하면서 사회적 갈등은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의 현실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촛불 집회 때만 해도 사람이 달라지면 정치도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제도와 틀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이른바 ‘적폐 청산’을 추진해 왔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든 적폐의 근원은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대통령제였다. 그걸 그대로 두고는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새로운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가올 총선에서 유권자의 선택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다시 작동하도록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건 국민뿐이다. 그리고 총선 후에는 한곳으로 집중된 권력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한 개혁, 즉 권력 구조를 바꾸려는 개헌 논의도 이뤄져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험하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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