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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편집국에서] 신물 나게 더딘 ‘규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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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지난 16일 오후 서울 강남구의 한 건물에서 열린 '타다 금지법 금지' 대담회에서 이재웅(가운데) 쏘카 대표가 공유경제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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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브라보.”

지난 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0년 경제계 신년인사회’. 덕담 차 나선 한 야당 대표가 단상에서 “지난해 수출이 전년 대비 10.3%나 내려갔는데도 정부는 경제가 잘되고 있다고 하는데, 경제인들은 얼마나 속이 터지겠느냐”고 하자, 좌중 속에서 터져 나온 화답이다. 행사장엔 청와대와 여당 주요 인사들도 있었다. 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날 행사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규제개혁’으로 모아졌다. 직ㆍ간접적인 표현이 이어졌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올해 한국 경제 성패의 관건은 한국 경제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꿔 기업의 자발적 투자 수요를 창출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이재하 대구상의 회장도 “기업이 국가다”란 에두른 건배사로 사실상 규제개혁을 호소했다.

규제개혁 주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요 사안마다 여지없이 기득권 세력과 결합된 정치공학적 셈법에 좌초되곤 했다. 승차공유 앱인 ‘타다’는 이른바 ‘타다 금지법’으로 알려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에 막혀 시한부 운행으로 후진할 태세다. 일본이나 중국에선 이미 허용된 원격의료에 대해 시행을 다짐한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 또한 기약 없이 미뤄진 지 오래다. 그나마 우여곡절 끝에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이터3법(개인정보보호법ㆍ신용정보법ㆍ정보통신망법)이 위안거리다. 그러나 법안이 발의된 후 무려 1년 2개월이 걸렸다.

규제개혁은 그 동안 여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볼모로 휘둘려온 게 사실이다. 틈만 나면 입버릇처럼 규제개혁을 내세웠던 정치권의 겉모습과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보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대통령 소속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개혁포털’ 홈페이지에 따르면 지난 2016년 5월 30일 시작된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원입법 규제 법안은 역대 최대 수준인 3,800건에 육박하고 있다. 겉으론 규제개혁을 외쳤지만 속으론 규제강화에 치중한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예 해외로 눈을 돌리는 토종 업체도 나오고 있다. 최근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첫발을 뗀 현대차의 차량 공유 사업이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선 차고지 등 주차 공간을 본인 소유로 해야 한다는 관련 규제 등으로 차량 공유 사업 자체가 어렵다. 공영 주차장이나 도로까지 활용 가능한 미국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지난 7~10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소비자가전 전시회 ‘CES 2020’ 행사장에서도 지지부진한 규제개혁 문제가 입방아에 올랐다. 올해 CES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게 무인항공기(드론) 분야다. 기업인들은 “우리나라의 드론 기술력은 선진국 수준인데 규제의 틀 때문에 추진력이 떨어진다”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했다. 드론 분야의 세계 1위 업체인 중국 DJI를 추격할 여력이 충분한데도 규제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얘기다. 정부는 지난해 ‘드론 분야 선제적 규제혁파 로드맵’까지 제시했지만 현장의 체감지수는 ‘제로(0)’에 가깝다는 게 기업인들의 토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생존을 위해 규제개혁은 필수다. 우리 기업들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해외 기업들과 경쟁하기도 버겁다. 이런 기업들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각종 규제로 주저 앉혀서야 되겠나. 오죽하면 참다 못한 정보기술(IT) 중소 벤처 기업인들이 ‘4.15 총선’을 겨냥해 ‘인공지능(AI) 규제개혁 비례당(가칭)’까지 창당하고 나섰겠나. 지난 16일 출범한 이 정당엔 발기인만 200명이 모였다.

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규제개혁’을 강조하고 나섰지만 현장에선 “이번에도 선언적인 구호로만 들린다”며 회의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생사를 가늠할 ‘골든타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허재경 산업부장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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