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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오동희의 思見]'눈에는 눈' 탈리오 법칙과 회복적 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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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편집자주] 산업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눈에는 눈'이라는 말이 세상 모두의 눈을 멀게 한다'(An eye for an eye only ends up making the whole world blind.)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던 인도 마하트마 간디가 누군가에 대한 응징을 그가 행한 동일한 폭력으로 되갚는 동해보복(同害報復)에 대해 반대하며 남긴 명언이다.

지난 17일 오후 2시 5분 서울고등법원 303호 법정,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에 대한 대법원 파기환송심 4차 공판장.

100명도 채 못 들어가는 좁은 이 법정에는 이날 네 종류의 목소리가 뜨겁게 얽혔다. 특검과 변호인 측, 재판부와 방청석에서는 각자 자신들의 생각과 믿음에 충실했다.

원고인 특검은 재벌개혁 조치 없는 준법감시위원회는 무의미하고 양형을 높여야 한다며, '회복적 사법'의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가는 재판부에 강한 항의를 표했다.

변호인 측은 합병비율의 적정성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문제를 따지려는 특검 측의 주장은 양형 심리를 하도록 한 대법원의 파기환송심 범위를 벗어났다고 주장했다. 또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를 통해 앞으로는 준법경영에 어긋나지 않는 기업운영에 힘을 쏟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재판부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에 방점을 둔 듯 기업범죄와 관련해 1991년 제정된 미국의 연방법원 양형기준 제8장의 준법경영 등 회복적 사법 취지와 이행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회복적 사법은 처벌에 초점이 맞춰진 현 형사사법체계와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 이해관계자까지 사건의 해결 주체로 참여해 상호이해와 원상회복 등을 통해 사회공동체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같은 논쟁이 벌어지자 방청석에서는 이 재판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그동안 대(對)삼성 투쟁을 벌여왔던 일부 노조원 등이 재판부에 이의를 제기하고, 제지되는 장면이 여러 차례 연출됐다.

재판부를 포함해 이 네 가지의 다양한 목소리는 이 법정이 풀어내야 할 난제다.

특검 등이 주장하듯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에 따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처벌하면 현재 가진 문제들이 해결되고 피해자들의 피해가 회복되는 길이 열릴 수 있을까.

최근 법조계에선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서 이어져 온 탈리오의 법칙에 따른 처벌로는 피해자나 그 주변 가족들의 마음의 응어리를 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길도, 재범을 줄일 수 있는 길도 쉽게 열리지 않는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처벌은 징벌보다는 피해자의 구제를 목적으로, 재범을 방지하는 교화의 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이들의 목소리다. 가해자로 인해 눈을 다쳤다고 가해자의 눈을 동일하게 다치게 하는 징벌을 내린들 피해자의 피해회복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죄의 상습범은 사회와의 격리를 통한 긴 교화 과정이나 아예 사회와의 영구적인 격리가 필요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처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이익이 피해자의 피해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형태의 처벌 방법이 논의돼야 한다는 게 법조계의 얘기다. 앞서 언급한 간디의 목소리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재판이 회복적 사법에 대한 논의의 큰 변곡점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정 부장판사는 지난해 빚 문제로 고민하던 부부가 자녀들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자신들은 살아나고 2명의 자녀 중 1명을 잃은(살해한) 사건에서 부인 B씨를 조건부 보석했다.

살인 및 살인미수로 1심에서 남편 A씨는 징역 5년, 부인 B씨는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사회적 영향, 남은 자녀의 미래, 자식을 잃은 가족 스스로 겪을 고통을 감안해 회복적 사법 차원에서 '새로운 삶을 열심히 살겠다'는 몇 가지 조건을 달어 부인의 보석을 허가했다.

구속이라는 처벌보다는 이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는 회복적 사법 방식을 채택한 셈이다.

정 부장판사는 앞서 2013년 인천지법 부천지원장일 때도 검찰 및 전문가 등과 함께 3개월간 10건의 형사재판에 회복적 사법을 시범 실시하는 등 처벌보다는 피해회복에 초점을 맞춘 판결로 유명하다.

이번 삼성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재용 부회장이 최근 1년간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의 피해회복이나 특검이 주장한 재벌의 지배구조 개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사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리더가 사라진 거대 조직 삼성에서는 오히려 그 1년 동안 다수가 복지부동이었다.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이날 재판이 끝난 후 일부 노조원은 "피해자의 피해회복이 없는데, 어떻게 회복적 사법이냐"며 재판부를 힐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회복적 사법 과정은 이제 막 시작단계에 접어들었다. 미래전략실이 해체되고,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이 진행된 최근 3~4년간 삼성 그룹은 시스템 마비 사태를 자주 경험하고 있다. 피해회복을 위해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통령의 강압에 응대한 결과로 두 명의 부회장을 비롯해 수명의 사장들이 구속되고, 100여명이 넘는 임직원들이 검찰에 소환되고, 재판을 받는 상황에서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제 다시 시작할 시간과 기회가 왔다. 아직 준법감시위원회와 전문심의위원회의 역할과 활동범위 등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삼성과 얽힌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기구 등이 만들어지면 회복적 사법의 길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설립에 이어 법원이 이 위원회가 제대로 활동하는지를 지켜보는 전문심의위원회를 설치키로 한 것은 회복적 사법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이 가진 무게로 인해 겪는 사회적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되기를 기대한다.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hunte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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