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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6 (화)

[임의진의 시골편지]땅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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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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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북쪽 원주민 검은 발족의 추장 까마귀 발의 노래다. “삶은 이와 같은 거라네. 어둔 밤을 밝히는 반딧불이. 겨울 한복판에 들소가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 푸른 초원을 달려가다가 땅거미 지는 노을에 사라져가는 작은 그림자.” 들소의 코에서 훅훅 나오는 콧김이 떠오른다. 그리고 땅거미. 거대한 평지 대륙에 드리운 어스름이 그립다.

저녁의 느낌은 늘 찌릿하다. 가수 김목인은 말했다. “밤이 오기 전 하늘은 살짝 밝아져 있었다. 슈퍼 앞 평상의 아저씨는 맥주 한 컵을 들고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고, 엄마들이 아이들을 타이르는 소리. 저녁이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암시하고 있었다.”

다세대주택 골목 어딘가 드리운 저녁. 옥상에서 보이는 건너 공터의 땅거미. 개가 누런 똥을 한 덩어리 누고 뒷발질을 해대는 소리. 아직도 골목을 누비는 두부장수와 칼갈이 아저씨. 창틀과 방충망을 고치는 용달 트럭의 반복되는 스피커 소리. 장 자크 상페의 그림책에 나올 법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달음질치며 내뱉는 소리들. 명절이 다가오면 떡 방앗간이 분주해지지. 세상이 암만 빵빵 빵집만 생겨나도 변두리는 아직 떡떡, 찰떡 시루떡 좋아하는 이들이 살지. 땅거미가 지면 검은 깨떡이 생각난다. 예전엔, 병든 자여 내게로 오라! 외치고 다니던 고물상 엿장수가 해가 저물기 전에 떨이로 다 팔고, 엿장수 맘대로 가위질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엿장수의 노래가 구성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젊어서 고생은 늙어서 신경통. 에구구 비명을 지르며 일어서는 할매는 저녁밥을 짓는다. 혼자 밥 먹은 지도 수수십년은 된 거 같아. 물을 말아 먹는 밥에 김치 한 조각. 호물호물 씹지도 않고 삼킨다. 이 동네에서는 삼킨다고 안 하고 생킨다고 해. 물도 마신다가 아니라 생킨다고 하고. 어둠을 삼키는 땅거미. 현대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어스름 시간을 못 느끼고 산다. 푸른 들판을 달리는 땅거미. 내 작은 그림자. 또 당신이라는 인생. 새해에도 부디 평안하시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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