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동면을 꿈꾸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벼 그루터기만 남은 논에 서리가 내리면 어른들은 서둘러 겨울 맞을 채비를 하곤 했다. 떼어낸 문틀에 두 겹의 창호지를 바르고 그 사이에 국화잎을 몇 장 집어넣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나중에 소읍으로 이사갔을 때는 광에 시커먼 연탄을 쌓아두었지만 시골에서는 겨우내 볏짚을 땔감으로 썼다. 바람 잘 통하는 대청마루에는 통가리가 놓이고 두어 가마 고구마도 채워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김장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니 월동 준비라는 말에서조차 격세지감이 든다.

경향신문

올겨울은 눈도 거의 없고 살을 에는 강추위도 아직 찾아오지 않아 부는 바람에서 봄뜻이 설핏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니까 더운 여름보다 체온을 유지하는 데 우리가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조금 다르게 질문해보자. 어떤 사람이 아이슬란드에 있을 때와 자카르타에 있을 때 그의 정맥에 있는 피의 색은 어느 쪽이 더 붉을까?

답은 자카르타이다. 우리가 내쉬는 날숨에는 이산화탄소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산소도 들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에서 건진 사람의 폐에 인공호흡으로 안전하게 산소를 제공할 수 있다. 전신을 돌아 심장으로 복귀하는 정맥 안에는 우리 신체가 미처 사용하지 않은 산소 기체가 섞여 있다. 열대지방인 자카르타에서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물을 분해하여 얻은 에너지를 쓸 일이 줄어든 탓에 아이슬란드에 있을 때보다 산소를 적게 사용한다. 적혈구가 산소를 더 많이 함유할수록 색상이 붉은 까닭에 적도에 사는 사람들의 정맥혈이 더 선홍색을 띠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1842년 독일의 의사 줄리우스 폰 마이어는 우리가 음식물을 먹고 연소하는 과정에서 얻은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법칙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음식물 속에 든 화학에너지가 일을 하는 근육의 운동에너지, 체온을 조절하는 열에너지 등으로 변하지만 그 총량은 변함이 없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마이어가 처음 제시한 이 가설은 후에 열역학 제1법칙으로 굳어지고 후세인들의 골머리를 꽤나 아프게 만들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함에도 겨울에는 야생에서 음식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은 극지방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그래서 일부 동물들은 아예 잠을 잠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바로 우리가 겨울잠이라고 부르는 생물학적 현상이다. 겨울잠은 다람쥐 같은 설치류 동물들에게서 빈번하게 관찰된다. 체중에 비해 체표면적의 비율이 높을수록 체온이 쉽게 떨어지므로 몸집 작은 동물들은 겨울나기가 힘들다. 온대지방에 사는 체중 60㎏의 여성은 10%가 되지 않는 에너지를 열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지만 몸무게가 25g에 불과한 사슴쥐는 그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 땅다람쥐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최장 9개월까지 잠을 자면서 거의 85%의 에너지를 절약하기도 한다.

이렇듯 겨울잠은 생존에 매우 유익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도 겨울잠을 잘 수 있을까?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보인다. 비교생물학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동물 세 계통 모두에서 겨울잠 현상을 목격했다. 진화 역사에서 동면이 오래된 형질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한 유전자들을 찾아 나섰다. 유전자를 편집하면 인간에서도 동면을 유도할 수 있으리라 희망한 것이다.

동면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찾아낸 단백질 중 눈길을 끄는 것은 혈액이 엉키는 것을 막는 단백질이었다. 에너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동면을 한다는 말의 화학적 의미는 산소를 적게 호흡해도 된다는 것이다. 1분에 200~300번씩 뛰던 땅다람쥐의 심장이 고작 3~5번 뛰고 숨은 4~6번 정도밖에 쉬지 않는다. 따라서 잠을 자는 동안에는 체온이 떨어지면서 아주 느리게 흐르는 혈액이 서로 엉키지 않게 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또한 자는 동안에는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저장이 가능한 지방을 동물의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무척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대사 효소들의 활성도 빠르게 변화한다.

그러나 동면 연구에서 발견된 더 놀라운 점은 동면하는 동안 동물들이 거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뇌에 외상을 가하면 활동적인 다람쥐는 커다란 손상을 입지만 동면하는 다람쥐는 거의 정상으로 회복된다. 움직임을 최소로 하면서 생체를 유지하고 손상을 치유하는 데 특별히 더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의학자들은 동면 연구에서 얻은 과학적 성과를 임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2019년 메릴랜드대학 연구진은 커다란 외상을 입은 환자의 혈액을 10도의 생리식염수로 대체하고 모든 생리 과정을 정지시켰다. 손상된 부위를 수술할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저온을 유지하여 생체 과정을 정지시키는 동면과 같은 현상을 우리는 가사 상태(suspended animation)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정지된 화면’처럼 인공적으로 가사 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식에 필요한 인간의 장기를 안전하게 보관해 멀리까지 운반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우주선에 탑승하는 비행사들을 ‘잠재워’ 먼 목적지까지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겨울잠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혜택이 균등하지는 않지만 추위를 피하는 여러 수단을 발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가끔 침엽수림 통나무집에서 봄을 고대하는 동면을 꿈꾼다.

김홍표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