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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충무로에서] 전세살이 약육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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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착실한 40대 회사원 박 모씨는 이삿짐 트럭 앞에서 주저앉아 우는 악몽을 종종 꾼다. 이미 단기 전세 계약을 맺어 갈 곳이 있는데도 최근 한 달간 극심한 마음고생을 한 트라우마다.

직장 때문에 서울에 올라온 그는 비교적 저렴한 잠실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시작했다. 장기 해외 근무를 하는 집주인을 만난 덕분에 이사를 자주 하지 않아 괜찮았다. 아이가 자랄 때 집을 살 생각도 했지만 참여정부 기조에 포기했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후 내리막을 탄 아파트 값에 안도했다. 이후 보수 정권에서 각종 혜택을 내세우며 내 집 마련을 부추길 때도 좀 더 저렴해질 때 사겠다고 결심했지만 잠실 아파트 집값은 그가 기대했던 수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쏟아지는 각종 부동산 규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르기만 하는 집값에 밤잠을 설쳤다. 20년 가까이 살아온 잠실에서 전세 세입자로도 살 수 없는 상황까지 떨어질까봐 불안했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초 같은 단지의 다른 동 아파트를 전세를 끼고 사 버렸다. 상승기에 매물도 희소해 정말 원하던 로열층도 아니었다. 그래도 진짜 내 집에 들어간다며 인테리어 구상에 들떴던 그는 지난해 12·16 부동산대책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지 못했다.

작년 말 박씨는 본인 아파트 집주인이 바뀐 것을 알게 됐다. 집주인은 올봄 계약이 끝나는 전세보증금을 2억원이나 올려 달라고 했다. 보증금을 좀 깎아 보려고 가을까지만 단기 계약 연장을 거론한 게 화근이었다. 집주인은 2년 계약 특약까지 들먹였다. 집주인 본인도 잠실 옆 단지에서 전세로만 오래 살다가 무리해서 작년 가을에 집을 샀으니 세금 부담을 전가할 수밖에 없다고 항변했다.

박씨는 당장 이사를 갈 때 전세자금대출을 회수한다는 걱정도 있지만, 정부가 전·월세 계약갱신청구권 같은 규제를 추가로 발표하면 덜컥 본인 집 세입자 권리가 우선시돼 본인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까 불안해졌다. 설마 소급적용하겠느냐는 주변 만류에도 기존에 상식적인 생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시장과 싸우겠다며 칼을 휘두르는 사이 자유시장경제의 수요와 공급은 꼬여 버렸다. 투기지역, 투기과열지구, 조정대상지역 등 외우기도 어려운 규제지역을 그으면서 선만 살짝 넘어가면 여기저기 풍선효과가 부풀어 오른다. 과잉 유동성이 넘쳐 나는 시장에서 투기꾼들을 주택 시장으로 몰아 준 장본인이 바로 정부다.

다주택자들에게 세금을 집중 공격해 매물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큰소리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과 싸우는 집주인들은 실탄이 넉넉하다. 매물로 내놓기보다 자식에게 저렴하게 증여할 방법을 찾기에 바쁘다.

[부동산부 = 이한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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