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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한 평 쪽방서 ‘외로운 설맞이’… “올해도 급식소 떡국 먹겠지”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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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앞두고 ‘영등포 쪽방촌’ 가보니… / 67채 건물 542개 방으로 쪼개 / 주민 500여명 도심 ‘외딴섬’ 살아 / 평당 임대료 월 10만∼20만원 수준 / 강남 월세 맞먹지만 환경은 열악 / 당국, 주거환경 개선 계획 불구 / 번번이 좌초돼 주민들 반신반의

세계일보

22일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의 한 주민이 취재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여기는 옆방에 살아도 서로 대화를 잘 하지 않아. 대부분 고향도 못가다보니 이번 명절도 무료급식소에서 주는 떡국을 먹지 않을까 싶다. 오갈 데 없어서 섭섭하고 울적한 동네다.“

설 연휴를 앞둔 22일 낮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30년째 사는 황해도 출신의 이모(78)씨는 설을 앞둔 심정을 이같이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3개 동(영등포·영등포본·문래)에 걸쳐 있는 이곳은 대형 백화점이 입점한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과 복합 쇼핑몰인 타임스퀘어 같은 고층빌딩 숲 속 사이에 ‘외딴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이씨가 사는 쪽방은 한 평(3.3㎡) 남짓한 크기로 침대와 옷가지가 놓인 선반을 빼고 나면 성인 한 명이 겨우 앉을 만한 좁은 공간만 있었다. 20년이 다 된 보일러는 작동하는 날보다 고장 난 날이 더 많아 올겨울도 이씨는 집보다 교회에서 씻은 날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겨울에도 패딩 점퍼를 입고 자는 것이 생활화됐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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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영등포 쪽방촌에는 이씨와 비슷한 처지의 주민 500여명이 67채의 건물을 542개의 작은 방으로 쪼개 살고 있다. 서울시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쪽방 면적은 1.65∼6.6㎡ 수준, 월세는 평균 22만원을 낸다. 평(3.3㎡)당 임대료로 계산하면 월 10만∼20만원에 이른다. 이는 매매가가 1평당 1억원을 넘었다는 강남의 한 아파트(3.3㎡당 20만원선)의 월세와 맞먹는 수준이지만 단열과 방음은 물론이고 냉난방 상태가 열악해 쪽방 주민들의 힘든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 특히나 열악한 시설 탓에 화재나 범죄 위험에도 상시 노출돼 있다.

쪽방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는 쪽방상담소를 통해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부 주거·안전설비의 수선도 지원해왔다. 이날 취재진이 방문한 영등포 쪽방상담소의 경우 매일 오전과 오후 한 번씩 화재 점검 등 순찰을 나선다. 건강이 좋지 않은 주민 35명은 ‘요보호대상자’로 분류해 하루 한 번씩 건강상태를 확인하기도 한다. 폭염과 한파에 특히 취약한 이곳 주민을 위해 특별대책반도 운영해왔다.

상담소 한 관계자는 “상담소는 근무 강도가 세다 보니 오래 버티는 사람이 적다”며 “재개발 후에도 상담소를 운영해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활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집만 새로 짓는다면 깨끗해진 쪽방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재개발 이후에도 사람들을 방에서 나오도록 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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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골목 모습.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지난 20일 '영등포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 및 도시 정비를 위한 공공주택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정부와 지자체는 최근 영등포 쪽방촌이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정비된다고 밝혔다. 지난 20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은 ‘영등포 쪽방촌 주거환경 개선 및 도시 정비를 위한 공공주택사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이 정비사업은 쪽방촌 주민과 지원시설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 발표에 따르면 영등포 쪽방촌 일대 1만㎡를 재정비해 쪽방 주민이 다시 입주하는 공공임대주택과 신혼부부를 위한 행복주택, 민간 분양주택 등 총 1190세대 규모의 주택이 공급된다. 쪽방 주민은 기존 쪽방보다 2∼3배(16㎡) 넓고 쾌적한 공간을 현재의 20% 수준(3만2000원·보증금 161만원)으로 저렴한 임대료로 거주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과거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이 번번이 좌절됐던 탓에 주민들은 정부의 발표에도 반신반의하는 모습이다. 앞서 2015년 토지주를 중심으로 도시환경정비사업이 추진됐으나 쪽방 주민 이주대책 문제 등으로 사업이 중단된 바 있다. 두꺼운 패딩을 입은 채 자신의 방에 있던 박모(74)씨는 쪽방촌에서만 20년 가까이 살았다며 “과거 재개발 얘기가 나왔을 때 보상을 노린 사람들이 몰려들어 오히려 방값이 올랐다”며 “실제로 실행되는 걸 봐야 믿을 수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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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째 영등포 쪽방촌에서 산 강모(66)씨도 “정부에서 하는 거면 땅 주인들한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땅을 매입하려 할 텐데. 여기 땅 주인들이 동의하겠나”라며 “여기 재개발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기대를 일축했다. 일부 주민들은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이곳에 찾아와 달콤한 공약을 내뱉고는 선거 뒤면 나 몰라라 하는 일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일부 주민은 정부 발표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25살에 이곳으로 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는 박모(41·여)씨는 “새집을 짓고 환경이 바뀌면 노숙하는 사람들이 집을 얻거나 다른 곳으로 갈 것 같다”며 쾌적한 환경으로 바뀔 것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이종민·이강진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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