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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명절이 더 서러운 근로정신대 김정주 할머니의 쓸쓸한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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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아버지·언니와 강제징용 끌려가

손자와 단둘이 생활…건강 문제 외출 어려워

“전범기업 상대 손배 승소했지만 사죄 우선”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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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위안부로 몰려서 쫓겨 살았어요. 지금은 다리가 아파 가족들을 못 만나니 설이 되면 더 외로워요.”

강제징용(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정주(89, 서울시 송파구) 할머니는 설 명절이 다가왔지만 마냥 즐겁지는 않다고 했다. 홀로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26살 손자와 살고 있는 김 할머니는 손자가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오전 9시부터 10평(33㎡) 남짓한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낸다.

김 할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은 1997년 아이엠에프(IMF) 때 사업 실패로 연락이 끊긴지 오래됐어요. 언니네 집으로 가려고 해도 몸이 불편해서 쉽지 않아. 이번 설도 손자와 보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전남 순천의 부잣집 딸이었던 김 할머니의 삶은 1942년 아버지가 경남 진해의 한 비행장 공사장으로 강제 징용돼 소식이 끊기며 시련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지병을 앓았던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다. 두살 위 언니(김성주 할머니)에게 의지하고 지내던 중 1944년 5월 일본인 여교사 오가끼 선생이 어느날 불렀다. 이미 졸업한 언니를 학교로 불러보라는 것이었다.

‘언니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려나 보다’라고 생각한 김 할머니는 여교사의 말을 따랐다. 언니 김성주 할머니는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 준다.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오면 된다”는 꾀임에 빠져 일본으로 건너간다. 김성주 할머니는 나고야 미쓰비시공장으로 끌려가 하루 종일 비행기 동체 철판을 자르는 작업을 했고 왼손 집게손가락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해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왼쪽 무릎뼈를 다쳐 평생 고생해야 했다.

1945년 2월 오가끼 선생은 졸업을 한달여 앞둔 김 할머니를 불렀다. 일본으로 가면 언니를 만날 수 있고 중학교도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김 할머니는 “언니가 일본으로 간 이후 계속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가 마음에 걸렸지만 언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어요. 다 거짓말이었죠. 언니를 만나기는커녕 일본 후지코시 강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으로 끌려가 1년 동안 고생을 했죠. 언니도 같은 고생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미안했어요”라고 회상했다.

낮에는 혹한 속에서 비행기 부품을 만들었고 밤에는 공습을 피해 도망다니는 날이 이어졌다. 김 할머니는 해방 후인 1945년 10월 말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행히 언니와 아버지는 먼저 집에 와 있었다.

김 할머니는 19살 때 경찰이었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편은 할머니가 일본에 갔다온 사실을 알았고 외도를 했다. 할머니는 35살 되던 해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행상으로 힘겹게 삶을 이어가던 김 할머니에게 사람들은 “몸댕이 뺐긴 년” “못된 년” 등 수군거리며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언니 성주 할머니와 김 할머니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길로만 다니며 평생 같은 동네에서 서로 의지한 채 살았다.

억울했던 김 할머니는 2003년 일본에서 후지코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2011년 10월24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했다. 언니 성주 할머니도 1999년 미쓰비시를 상대로 일본에서 소송에 나섰지만 패소한 이후였다.

김성주 할머니는 2012년, 김정주 할머니는 2013년 한국에서 다시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성주 할머니는 승소가 확정됐고 김 할머니는 승소를 앞두고 있다.

김 할머니는 “구슬은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소송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 있나. 억울해서 일본한테 사죄를 꼭 받아야겠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사죄를 받을 수 있게끔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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