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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40년 만에 재회한 첫사랑, 기억의 퍼즐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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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듯 끝낸 서툴고 연약했던 사랑 / 그랬기에 미안했고 마음 아팠던 삶들 / 세상의 모든것은 변화한다는 말처럼 / 둘 사이 지워질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 / 특유의 감성적 문장·섬세한 심리묘사

세계일보

공지영은 작가의 말에서 “가슴 아픈 얘기이지만 당연히 허구”라면서 현실과 허구를 제대로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특유의 감성적 문장과 섬세한 심리묘사로 사랑의 본질에 천착하려는 공지영 작가의 열세번째 장편소설 ‘먼 바다’(해냄)가 나왔다.

지워지지 않는 첫사랑에 가슴앓이했던 기억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팠던 기억을 더듬으면서 육체에 각인된 기억을 완전히 잊는 데는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0년에 안타깝게 헤어진 두 주인공 미호와 요셉이 뉴욕에서 재회하며 벌어지는 애틋한 사연이 27개의 장으로 펼쳐진다.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미호가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발견한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다. 원문은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 앞에 40년이란 세월은 말 그대로 불가역의 시간이다. 이집트로 탈출한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에 다다르기 위해 육체에 각인된 이교도의 습관을 버리기까지 광야를 헤매야 했던 시간이었다. 아련하고 순수했던 첫사랑, 그러나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시간의 무상함 앞에 가장 크게 변질되는 대상이다.

독문학과 교수인 미호는 동료 교수들과 심포지엄에 참석하게 되어 마이애미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그녀는 1년 전 우연히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닿은 첫사랑 남자 요셉과의 재회를 계획한다. 성당의 고등부를 가르치던 신학생 요셉과 여고생 미호는 춘천행 기차에서 첫눈에 서로에게 반하고 서서히 물들어간다. 전두환 군부세력의 탄압이 광주항쟁 등으로 격화되던 때, 미호의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고 교수직에서 해임된다. 대학입시를 마치고 난 어느 날 요셉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미호는 다급하게 도망치고, 그렇게 둘의 만남은 끝나버린다. 대학에 들어간 미호는 결국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픈 기억의 땅을 떠나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신학생 요셉의 남다른 삶의 행로와 군부에 짓밟힌 아버지의 삶 등, 어린 여고생이 감당하기엔 쉽지 않은 현실이었다. 미호는 평생 가슴속에 간직해 왔던 그와의 마지막 만남에 대한 질문을 되새기며 뉴욕으로 향하지만, 시간이 변화시킨 요셉의 모습과 서로 엇갈리는 기억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뉴욕의 역사박물관과 9·11 메모리얼 파크를 걸으며 미호는 둘 사이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 있음을 발견한다.

미호가 요셉과 해후하는 시간은 그녀를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평생 간직했던 요셉에 대한 미안함과 고통 속에 죽어갔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 청춘 시절 아파했던 자신의 젊은 날과 재회한다. 사랑했지만 한없이 서투르고 연약했던, 그래서 도망치고 상처 주었던 이들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 과정을 통해 마침내 미호와 요셉은 각자의 삶의 절정마저 지우고 살게 했던, 서로 진정으로 신뢰하고 사랑했던 그 마지막 기억의 퍼즐을 맞추어간다.

세계일보

이 작품은 옛 감각을 깨우듯 속도감 있게 펼쳐진다. 1980년의 서울과 현재의 뉴욕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첫사랑에 빠진 두 남녀의 애절하면서도 풋풋한 마음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자연사박물관과 9·11 메모리얼 파크 등 인물들의 심리와 상황을 상징하는 듯한 독특한 배경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공 작가는 그동안 많은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사랑의 의미와 모습에 천착해 왔다. 이번 작품도 그 결과물이다. 첫사랑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일상적인 소재를 토대로,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적극 밝혀 크고 작은 논란에 휘말려왔다. 그러나 원고지 670매의 경장편 분량인 이 작품을 통해 거듭 사랑의 작가임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1988년 등단한 공지영은 1993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국내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 작품은 페미니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고등어’, ‘인간에 대한 예의’, ‘봉순이 언니’, ‘도가니’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받은 중견 작가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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