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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주방·거실‧서재가 집 밖에 있다면…후암동에 특별한 공간 만든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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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 ⑦ 도시공감협동조합

“집에서 못하는 걸 집 밖에서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원룸 등 협소한 집에서 살다 보면 잘 갖춰진 주방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가령 친구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주고 싶을 때, 연인과 기념일을 맞아 근사한 식탁을 차려내고 싶을 때 말이다. 독립된 나만의 서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반나절쯤은 번잡한 집안일에서 벗어나 오롯한 나만의 작업실에서 머무르고 싶다. 동네 사랑방처럼 부담 없는 모임 장소가 필요할 때도 있다. 카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은 오지 않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필요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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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나온 공유 공간, 마을에서 누리는 공유 거실인 '후암거실' 전경. 거실에 흔히 두는 넓은 소파와 영상기기를 뒀다.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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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걸 집 안에 갖춰 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친구들을 초대해 근사한 요리를 차려낼 수 있는 널찍한 주방과, 나만을 위한 음악을 틀어놓고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근사한 작업실,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 좋은 영화라도 한 편 볼 수 있는 사랑방까지.

후암동에 가면 이런 공간들이 있다. 다만 한 집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후암동 내 5분 거리에 옹기종기 문을 연 후암주방, 후암거실, 후암서재가 그곳이다. 후암주방과 거실, 서재는 집 밖으로 나온 공유 공간이다. 여러 명이 공유하는 주방, 거실, 서재라는 의미지만 함께 한다는 의미보다는 집 밖으로 나왔다는 데 더 의미가 있다. 필요할 때 일정한 비용을 내고 신청하면 쓸 수 있는 나만의 주방, 서재, 거실이다.

후암주방은 7000원에서 1만원이면 반나절을 사용할 수 있다. 보통 하루 두 팀이 이용하고 한 달 평균 50~55팀이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추억을 쌓는다. 대부분 가족이나 친지, 친구와의 식사 모임을 위해 공간을 빌린다. 주로 원룸 등 협소한 공간에서 사는 청년들이 주 고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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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춰진 주방이 필요한 날, 빌려 사용할 수 있는 '후암주방.' 기념일이나 특별한 모임이 있을때 주로 찾는다.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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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서재는 책꽂이와 책, 테이블과 소파, 싱크대 등이 구비된 작은 작업실이다. 4인이 8시간 이용할 경우 5만원의 이용료를 내면 된다. 책을 보러 오기도 하고, 회의나 소규모 모임을 하기도 좋다. 3~4명이 참여하는 소규모 클래스도 이루어진다. 이곳은 후암동 주민들의 이용 비율이 특히 높다. 집 근처 카페도 좋지만 조용한 서재에서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어 단골손님의 비율도 높은 편이다. 청년도 많이 찾아오지만 40대까지 이용 고객의 연령대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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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동네 사람들의 이용 비율이 특히 높은 '후암서재.' 나만의 작업실로 사용하거나 독서 모임이나 취미 클래스 등 소규모 모임이 열린다.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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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거실은 말 그대로 여느 가정집 거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너른 소파와 TV를 대신한 빔프로젝터가 놓여있는 공간이다. 4~5시간 이용료는 3만원에서 8만5000원 정도다. 생일파티부터 영화감상, 독서토론 모임 등을 열기 좋은 공간이다. 이곳 역시 주민들의 이용 비율이 높은 편이다. 어린아이가 있어 일반 카페에 가기 어려운 주부들이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 모임을 갖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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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잠시 빌리는 공간이지만 마치 우리집 거실에 들어선 것처럼 편안함을 줄 수 있도록 차분한 톤으로 만들었다.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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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자락 아래 야트막한 구릉 지대 자리한 후암동은 서울에서도 잘 찾아보기 어려운 저층 주택지다. 고층 아파트나 빌딩 대신 야트막한 단독 주택과 빌라는 물론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적산 가옥도 드물게 남아있다. 낡았지만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에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카페와 식당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요즘이다. 후암동의 매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후암주방과 거실, 서재를 만든 사람들이 있다. 여섯 명의 젊은 건축가들이 모인 ‘도시공감협동조합’이다. 지난 17일 후암동에서 도시공감협동조합의 이준형(36) 건축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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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공감협동조합의 젊은 건축가들. 왼쪽부터 정지혜(39), 김아름(37), 서유림(36), 이준형(36), 이지민(26), 이기훈(29).[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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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이 궁금했던 청년들



“집 하나보다는 그 집이 위치한 동네, 마을, 지역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준형 건축가는 “단순히 건축물을 하나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지역이나 마을, 도시에서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말한다. 지역에 관심이 많은 성균관대 건축학과 선후배 여섯 명이 의기투합해 건축 사무소를 만들고 이름을 ‘도시공감’으로 지은 이유다. 창업은 2014년 11월에 했다. 처음부터 사무실을 찾기보다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지역을 찾는데 몰두했다. 성북동이나 충신동 등 서울 시내 오래된 저층 주거지 위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 2016년 여름쯤 우연히 후암동을 둘러봤다. 이준형 건축가는 “건축가로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싶은 동네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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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의 골목길을 손으로 그렸다. [사진 후암가록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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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한 주택의 형태가 남아있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의 목조 가옥부터 해방 이후 지은 건물, 가장 최근에 지어진 빌라까지, 우리나라 근현대 60여년 정도에 나타난 거의 모든 가옥 형태가 혼재되어 있다. 남산 아래 구릉지에 자리해 경사진 지형도 매력적이었다. 높은 집에서 보이는 낮은 집들의 모습, 낮은 집들에서 보이는 높은 집들의 모습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후암동의 매력을 만들어내는 집들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후암동 일대의 20년 이상 오래된 집을 돌며 주택을 실측하고 인터뷰를 통해 집과 삶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를 도면과 이미지로 정리해 기록물로 만들고 ‘후암가록’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전시했다. ‘후암가록(家錄)’은 말 그대로 후암동의 집을 기록한다는 의미다. 입장료 없이 후암동이 궁금한 누구나 들러 관람할 수 있다. 간혹 젊은 작가의 전시나 동네 아이들과 그린 그림이 전시되기도 한다. 누구나 오가며 들를 수 있는 후암동의 작은 갤러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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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의 오래된 집과 공간에 담긴 이야기를 기록해 전시했다. [사진 후암가록 공식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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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못하는 걸 집 밖에서 할 수 있다면



청년 건축가들이 집에 대해 고민할 때 ‘공유’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땅값과 집값이 비싼 서울에서 젊은 세대들은 점점 작은 집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준형 건축가는 “집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확장된 집의 기능을 마을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떠올렸다”고 한다. 집 밖으로 나온 공유 공간, 후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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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기존 건물을 개보수하고 작은 간판을 활용했다. 후암서재 전경.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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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의 비어있는 상가를 개조해 2017년 3월 가장 먼저 후암주방을 만들고, 몇 개월 후 후암서재를 만들었다. 지난해 7월에는 후암거실을 만들었다. 오는 3월 문을 여는 후암별채도 한창 공사 중이다. 후암별채는 도시인을 위한 1인 휴식 공간으로 한나절을 빌려 도심 속에서 책을 읽고 차도 마시고 목욕을 하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 기획됐다. 한마디로 ‘호캉스(호텔+바캉스)’의 공유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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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 건물이 인상적인 '후암거실' 전경.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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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만들 때는 신축보다는 기존 건물을 활용하고 간판도 튀지 않게 만드는 등 후암동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했다.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적은 비어있는 자투리 상가를 주로 활용했다. 후암주방만해도 약 10㎡(3.2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다. 작지만 조리 기구부터 주방 소도구 번듯한 식탁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실내를 디자인할 때는 나무를 주로 사용하고 조명도 너무 밝지 않게 했다. 여러 명이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내가 빌린 시간만큼은 내 집에서 머무는 것 같은 아늑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다. 실제로 후암서재에 들어서면 오래된 서재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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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후암주방.' [사진 도시공감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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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은 비대면 서비스로 한다. 모든 예약은 온라인이나 전화로 받고 비밀번호 등 안내는 문자로 진행한다. 물론 입구에 CCTV도 있고 건축사무소가 근방에 있어 비상상황에는 대비할 수 있다. 인력 투입을 최소화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이었지만 이용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어 환영받는다. “처음에는 월세나 낼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니 예약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의가 밀려들었다. 특히 후암주방의 인기가 높았다. 먹방이나 쿡방 등 요리와 먹을거리에 관심이 커진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최소 특별한 날만큼은 손수 요리하고 이를 나누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제대로 건드렸다.



다양한 공간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공유 공간은 공간 복지라는 측면에서 논의되기도 한다. 공간을 누리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지의 형태로 공간을 빌려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이준형 건축가는 “후암 프로젝트의 공간들은 무상으로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 복지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다만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공간을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준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은 카페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공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얘기다.

공간을 만드는 것은 건축가들의 몫이지만 공간을 채우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만든다. 후암 프로젝트의 공간들에 비치된 방명록에는 연인과 데이트하며 만들어 먹은 파스타 이야기, 서재에서 친구들과 여행 계획을 세운 이야기가 빼곡하다.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은 공유 주방과 거실, 서재라는 낯선 공간을 친숙하게 만든다. 이준형 건축가는 “공유 공간이라는 껍데기를 만들었을 뿐인데 이용객들이 알맹이를 채워줬다”고 말한다.

도시공감협동조합의 후암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후암동도 새삼 조명을 받고 있다. 온전히 후암 프로젝트 때문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후암동의 매력을 찾아 젊은이들이 찾는 카페와 식당 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있다. 외부 자본이 급하게 밀려들어 오는 것은 기존 주민들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이다.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에 대한 고민은 없을까. 이준형 건축가는 “아직 후암동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논할 정도로 뜨거운 상권은 아니지만 후암동이 그렇게 된다고 하면 밀려들어온 자본이 빠져나갈 때 남은 자리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며 “유행 타지 않는 공간을 만들고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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