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듀나의 내 인생의 책]①원숭이의 재판 - 제롬 로빈스·로버트 E 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비이성’의 지독한 현재성

경향신문

어렸을 때는 소설보다 희곡을 더 많이 읽었다.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나만의 연극을 연출하는 걸 좋아했다. 제롬 로빈스와 로버트 E 리의 희곡 <원숭이의 재판-바람을 이어받을지어다>는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수록된 희곡으로 같은 책에 있는 유진 오닐이나 아서 밀러의 작품보다 더 자주 읽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몇 년 뒤 AFKN에서 스탠리 크레이머가 감독한 영화 버전을 방영했을 때 자막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1925년 존 T 스콥스라는 테네시의 교사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쳤다가 재판을 받았다. 당시 스콥스의 변호사는 전설적인 클래런스 대로였고 원고 측엔 정치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섰다.

1955년 나온 ‘바람을 이어받을지어다’는 원숭이 재판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 사건을 픽션화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 이름은 모두 바뀌었고 몇몇 사건들은 극적 효과를 위해 변형되었다. 막판에 브라이언을 모델로 한 매튜 해리슨 브로디가 법정에서 성경의 예언자들 이름을 외쳐대다가 쓰러지는 장면 같은 건 당연히 허구다.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알았지만 그 장면을 좋아했다.

이 희곡이 나왔을 무렵 매카시즘이 한창이었다. 원숭이 재판은 1950년대 정치 분위기를 비판하고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 끌려나왔다. 나는 이 둘을 연결시키지 못했고 고대 종교의 탄압을 극복하며 전진하는 과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었다. 슬픈 일은 21세기의 5분의 1이 지난 지금, 과거의 전설이 되어야 마땅한 이야기가 이전보다 더 지독한 현재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더 어리석고, 비이성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완승하는 건 여전히 힘들다.

듀나 | SF작가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지금 많이 보는 기사

▶ 댓글 많은 기사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