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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플러스] 펀드판매 매뉴얼 보니…“어! 현장과 너무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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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에 투자책임만 넘기기면 돼

‘각서’만 받으면 위험등급 무력화

상품 추천 판매사 시책에 좌우돼

판매직원 한 사람이 전과정 전담

다양한 상품 설명 사실상 불가능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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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박준규·홍태화 기자] 파생연계상품(DLF), 라임자산운용 펀드 사태가 잇달아 터지면서 은행들의 금융상품 판매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지켜야 할 ‘매뉴얼’이 엄연히 있지만 현실에선 제대로 작동을 안했다.

은행들은 자본시장법에 근거해 펀드 등 투자상품을 취급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 ‘표준투자권유준칙’과 ‘집합투자상품 표준판매 매뉴얼’이 대표적이다.

표준판매 매뉴얼엔 은행이 고객에게 펀드를 판매하기까지의 과정이 세밀하게 정리돼 있다. 일종의 ‘교본’이다. 금융투자협회의 투자권유준칙을 기초로 한다. 이대로만 한다면 법적으로는 불완전판매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한 시중은행이 작년 말 개정한 ‘표준판매매뉴얼’을 살펴봤다. 펀드 판매 과정을 6단계로 나눠놨다. ▷1단계(투자자정보 파악) ▷2단계(투자자 유형분류) ▷3단계(투자자에게 적합한 펀드 선정) ▷4단계(펀드에 대한 설명) ▷5단계(투자자 의사 확인) ▷6단계(사후 관리) 등이다.

1~3단계는 특히 중요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취급하는 수백가지 펀드 가운데서 개별 예비 투자자와 딱 맞는 상품을 매칭하려면 충실하게 이뤄져야 하는 절차”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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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중은행의 투자자정보 확인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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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정보 확인서 작성은 첫 단추를 꿰는 일이다. 확인서에는 연령, 수입 여부, 투자 경험·지식 등을 묻는 문항이 있다. 고령자(만 65세 이상), 은퇴자, 주부임을 체크해야 하기도 한다.

은행은 고객이 작성한 투자자정보 확인서를 바탕으로 고객을 점수화(Scoring)해 5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공격투자형(81점 초과) ▷적극투자형(68점 초과~81점 이하) ▷위험중립형(55점 초과~68점 이하) ▷안정추구형(43점 초과~55점 이하) ▷안정형(43점 이하) 등이다.

투자자는 확인서의 모든 항목을 반드시 기입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 경우 은행에선 적합한 펀드 권유가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 알린다.

고객의 투자유형이 정해져야 상품 권유 단계로 넘어간다. 각 고객의 유형마다 권유할 수 있는 펀드의 투자위험등급은 다르다.

은행의 판매매뉴얼에는 ‘투자권유가 가능한 투자상품’이란 기준〈표 참조〉도 들어가 있다. 가령 위험중립형이라면, 은행에선 상품위험도가 4~6등급인 상품만 권유할 수 있다. 무슨일이 있어도 원금을 지켜야 하는 안정형 투자자들은 원칙적으로 6등급(매우 낮은 위험) 상품만 권유할 수 있다. 원칙은 위험등급을 감내할 수 있는 투자자에 제한해서 펀드를 권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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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일 고객이 기대수익률이 높은 공격적인 상품을 원한다면 어떻게 할까. 은행들의 투자권유준칙과 표준판매 매뉴얼에는 “상품 목록을 보여주고 특정 문의를 할 경우에는 답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즉 적극적인 권유는 못하지만 고객이 원하면 설명은 할 수 있다. 고객이 결국 자신의 투자유형을 벗어나는 상품에 가입하면, 은행은 ‘위험등급초과 가입확인서’ 등을 받아둔다. 일종의 각서다.

4단계는 불완전판매를 가늠하는 과정이다. 4단계(펀드에 대한 설명)는 은행 직원이 투자설명서를 이용해 펀드의 주요 사항을 일러주는 절차다. 펀드에 편입된 자산, 운용 전략, 원본손실의 위험과 수수료를 비롯한 각종 비용 등을 충실히 설명해야 한다.

통상 은행의 판매 매뉴얼엔 15가지 ‘투자자에게 설명할 사항’이 명시돼 있다. DLF 처럼 해외금리를 기초자산으로 삼거나, 해외자산에 투자하는 상품이라면 해당 국가나 지역의 경제, 증시 상황까지 추가로 설명해야 한다.

5단계에선 지금까지 설명을 토대로 고객으로부터 투자 의사를 확인하게 된다. 고객이 투자의사를 밝히면 서류 작성 같은 작업을 벌이게 된다. 다만 은행의 매뉴얼엔 직원의 금지행위 16가지 정도를 규정한다. 대표적인 항목이 ‘펀드의 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항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투자자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매도하거나 매수하게 하는 행위’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크다. 최근 헤럴드경제 기자가 직접 펀드 가입 절차를 밟아봤지만. 지난해 DLF 대규모 손실 사태 이후에도 이런 매뉴얼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판매사들이) 펀드 판매를 할 때 절차를 따르긴 한다”면서도 “(현장에선) 설명이 아니라 면피를 위한 조건만 충족하려는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라임펀드’ 환매중단 사태에서도 판매사인 은행들이 펀드판매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일각에선 번지르르한 규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란 지적도 있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매뉴얼대로 A부터 Z까지 설명하려고 하면 바쁘다, 어렵다면서 알아서 해 달라고 하는 분들도 많은 게 사실”이라고 하소연했다.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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