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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에세이 오늘] 빌리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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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관객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관객 한 사람이 멍청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멍청이 관객 1000명이 극장에 모이면 천재가 된다."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 성공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은 거대한 집단지성으로서 작품의 밑바닥까지 남김없이 살핀다. 그들은 감독이나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복선과 상징마저 찾아낸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신비에서 신화로 완성돼간다. 와일더 감독은 영화가 관객의 예술임을 알았다. 수많은 영화 관련 명언을 남겨 아직도 회자된다. "관객은 변덕스러운 존재다." "관객의 목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마라." "2 더하기 2까지만 보여주고 답이 4임은 관객 스스로 알게 하라."


한 작품으로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감독은 많지 않다.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은 그래서 더 대단하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가 지난달 11일 보도했듯 "대부분이 미국인인 영화산업 종사자 6000여명이 뽑는 아카데미상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단의 선택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델버트 맨 감독의 '마티'가 1955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195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지 55년 만의 쾌거였다. 와일더 감독도 '잃어버린 주말'로 1945년 아카데미상과 칸 영화제 최고상(1954년까지는 '황금종려상'이 아니고 '그랑프리'라고 했다)을 차지했다. 그러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를 비롯한 열한 작품이 동시에 상을 받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인명사전은 와일더 감독을 '190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유태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영화감독, 극작가, 제작자'라고 소개한다. 이때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다. 와일더 감독의 고향은 '수차 베스키드즈카'란 곳인데 현재 폴란드 땅이다. 와일더 감독의 원래 이름은 자무엘이고 빌리는 그의 어머니 에우게니아가 아들을 부를 때 사용한 애칭이다. 빈 대학교를 중퇴하고 기자가 됐다가 독일 베를린에 가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뒤 유태인 탄압이 심해지자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럽을 떠나지 못한 그의 가족은 여러 수용소에 흩어져 목숨을 잃었다. 와일더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극작가와 감독으로 성공했다. 2002년 오늘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셋대로' '사브리나' '7년 만의 외출'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하오의 연정'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저널리스트 경력이 말해주듯 와일더 감독은 글 솜씨가 뛰어났다. 하지만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와일더 감독은 라디오를 듣고 영화를 보며 영어를 배웠다. 하루에 단어를 스무 개씩 외웠다. 이렇게 공부한 영어로 할리우드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단지 문장만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다. 와일더 감독의 영화 '제17 포로수용소'에 출연해 아카데미 남자주연상을 받은 윌리엄 홀든은 와일더 감독을 "면도날로 가득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표현했다. 와일더 감독은 솔직하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유머감각을 타고났지만 위트에서 독기가 묻어났다. 천재들은 순간에 삶의 밑바닥을 짚어낸다. 와일더 감독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명언은 대개 고전이 됐다. "아침에 일어나기 위해 꿈을 가져야 한다"는 충고도 그중의 하나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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