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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자가만난세상] 조주빈은 ‘악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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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딸이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수습기자 시절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만난 A씨는 말을 하다 멈칫했다. 말하는 게 오히려 딸에게 해가 되진 않을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계심도 느껴졌다.

A씨의 딸 B양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B양은 어느 번화가에서 한 남성에게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았다. 월 수익 200만원, 휴가비 30만원. 고등학생이라면 혹할 만도 했다. 어떤 일인지 물어도 요리조리 말을 돌리던 남성은 그날 이후 B양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나 발신번호제한으로 전화나 영상통화를 걸어 연락을 해왔다.

세계일보

유지혜 사회부 기자


“이런 알바하는 애들 많아.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사진 좀 보내봐.” B양은 이런저런 사진을 보내다 결국 노출이 있는 사진까지 보내게 됐다고 했다. 그 이후의 일은 A씨도 잘 알지 못했다. A씨는 “딸과 원래 비밀이 없는 사이인데 이번 일은 제대로 말하질 않는다”며 “사진을 빌미로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너무 걱정돼 일단 경찰서를 찾았다”고 토로했다.

‘n번방’과 ‘박사방’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문득 이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B양이 조주빈(25)씨의 범행 피해자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B양의 가해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다. 이러한 디지털 성착취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범죄가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있었단 사실이다. ‘박사’ 이전에 ‘갓갓’이, ‘와치맨’이, ‘켈리’가 있었다. 텔레그램 이전에 소라넷, 웹하드, 텀블러, 다크웹이 존재했다.

조씨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가 ‘악마’여서, 비정상이라서 이런 범죄를 예외적으로 저질렀다는 식의 해석으로는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당연히 조씨를 엄벌에 처해야 하지만, 조씨 한명을 벌준다고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본질은 그동안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단순히 음란물 공유나 개인의 일탈쯤으로 치부해온 한국 사회다. 과거 성희롱이 그랬고, 가정폭력이 그랬다. 30년 전만 해도 ‘성희롱’은 범죄가 아닌 친밀감의 표시 정도로 여겨졌다. 1993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으로 피해자가 6년간의 법정투쟁을 벌이고 나서야 성희롱이 범죄라는 인식이 생겼고,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직장 내 성희롱을 제재할 수 있는 조항이 만들어졌다. 가정폭력도 마찬가지다. 살인, 폭행, 강간 등 엄연한 범죄가 가정 안에서 이뤄진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가 됐다.

조씨 검거 이후로 경찰과 검찰, 정부부처를 가리지 않고 디지털 성착취 범죄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는 사회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A씨를 만난 건 1년 전이다. 당시 경찰은 관할구역 문제로 A씨를 돌려보냈다. B양이 남성을 만난 번화가 근처 경찰서를 찾으라는 이유였다. 아마 B양이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범죄를 디지털 성착취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랬을 것이다.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겠다던 A씨에게 겨우겨우 명함을 쥐여 보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요즘이라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부디 B양이 용기 내 도움을 요청했기를, 그리고 수사당국이 제대로 응답했기를 바랄 뿐이다.

유지혜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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