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시 쓰는 후배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입던 분홍색 외투를 태우면서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자취방 밥솥의 보온 불빛에서 날개 다친 반딧불을 보기도 하는, 그런 탁월한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진 시인이었다. 어떻게 하면 뻔하지 않은 이야기, 새롭고 독창적인 이야기, 나만의 고유한 이야깃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묻자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자신의 비기(秘技)를 알려주겠노라 했다.
일단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쓰고자 하는 대상을 떠올려봐. 예컨대 어머니에 대해 쓴다고 쳐. 어머니,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올라? 갖은 고생으로 굳은살이 박인 어머니 손? 내가 아플 때 차라리 당신이 대신 아프고 싶다며 속상해하시던 모습? 내가 내뱉은 모진 말에 상처받고 우시던 모습? 좋은 건 전부 자식 주고 당신은 늘 뒷전이던 기억들? 뭐든 떠오르는 대로 다 종이에 써. 1번부터 50번까지. 다 썼어? 그러면 버려. 50번까지 전부 다. 그리고 51번부터 다시 써. 거기서부터 뻔하지 않은 이야기, 독창적인 이야기,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야. 50번 정도까지는 사실 누구나 비슷한 것을 떠올리거든.
그날 저녁 당장 그의 비기를 실행해보았다. 50번은커녕 30번 채우기도 힘들었다. 기껏 채운 것을 버리기는 더 힘들었다. 그러나 다 버려도 남은 것이 0은 아니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그의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던 참신한 비유, 기발한 시선, 낯선 사유, 그것들이 모두 51번째 아이디어에서 나왔구나 하는 깨달음이 거기 있었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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