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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4월의 6ㆍ25전쟁영웅에 성관식 해병대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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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성관식 해병대 소령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4월의 6ㆍ25전쟁영웅에 성관식 해병대 소령이, 4월의 독립운동가에 오광선ㆍ정현숙 독립군 부부가 선정됐다.


31일 국가보훈처는 '4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6ㆍ25전쟁 당시 임진강 일대 아군의 핵심 요충지 확보 등에 전공을 세운 성관식(1928.5∼1958.9) 해병대 소령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1928년 광주에서 태어난 성 소령은 1951년 3월 수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6ㆍ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1일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 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을 맡아 서부전선 장단 일대에서 중공(중국)군과 대치했다.


1952년 9월 중공군이 대규모의 인해전술로 방어 중인 장단 사천강 주변의 제36전진 진지를 공격해오자 성 소대장은 연대의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 부대를 차단했다. 이어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대원 5명과 함께 매몰되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전기를 찾아 교신을 재개해 아군의 포병 지원사격으로 고지를 포위하고 있던 적군을 격멸했다. 진지를 성공적으로 방어해 임진강 일대 아군 주저항선의 핵심 요충지를 확보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종전 후 해병대 교육단에서 신병 교육에 힘썼고, 1958년 해병대 항공대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58년 9월 비행 훈련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31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4월의 독립운동가'로 오광선ㆍ정현숙 독립군 부부가 선정됐다.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오광선 선생은 1913년 삼악학교를 졸업한 후 정현숙(이명 정정산) 선생과 결혼했다. 1914년 서울 종로 상동 청년학원에 입학했으나, 일제 총독부의 지속적인 탄압과 재정난으로 학원이 1915년 문을 닫게 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동흥학교 군사교관과 체육 교사로 복무하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군단 중대장에 임명됐고, 1930년 7월 이청천과 홍진 등이 중국 위하현에 결성한 한국독립당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1934년 2월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교관을 맡아 군관 양성에 힘썼다. 이후김구 선생의 지시로 1936년 베이징으로 파견되어 첩보활동을 벌이던 중 일제 경찰에체포됐다. 신의주 교도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11월 귀국해 '대한국군준비위원회', '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에 참여했다. 1948년 12월 육사 8기로 입교해 이듬해 육군 대령으로 임관,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했다.


부인 정현숙 선생은 1919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화전을 일구며, 남의 집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했다. '만주의 어머니'로 불렸던 정 선생은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원으로 활동했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정부는 오광선 선생에게 1962년 독립장을, 정현숙 선생에게 1995년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한편 부부의 두 딸 오희영ㆍ희옥 선생 역시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선전활동에 참여했다. 광복군에 입대해 초모(모집) 공작 등을 맡았고, 사위(오희영의 남편 신송식)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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