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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208> 알버르트 버르트의 혁신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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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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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피처. 한 편의 가격으로 영화 두 편을 상영하는 것을 말한다. 1915년 미국 보스턴파크 극장은 관객이 줄자 메리 픽퍼드 출연의 히트작 '폭풍 속의 테스'를 신작에 끼워 상영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다른 추억의 히트작들도 추가한다. 얼마 뒤 다른 개봉관들도 따라 하기 시작한다.”- 1932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서

영화관은 혁신에서 독특한 곳이다. 이곳의 혁신을 말한다면 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알버트 버트다. 실상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영화관 상당 부분은 그가 만든 혁신궤적 덕분이다.

이야기는 1980년대 벨기에로 간다. 어느 곳이나 그랬듯이 여기 영화관도 내리막길이었다. 텔레비전, 비디오, 위성방송, 케이블방송까지 시장을 빼앗아 갔다. 영화 관객은 4분의 1로 줄었다.

상영관은 문을 닫거나 겨우 버티고 있는 극장들은 쪼그라드는 시장에서 남은 관객을 놓고 경쟁했다. 누군가 뭔가 시도하면 다른 곳도 따라 했다.

1988년 이런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 알버르트 버르트가 첫 키네폴리스를 개관한다. 이건 종래 알고 있던 그런 영화관이 아니었다.

스크린 25개, 좌석 7600개짜리 세계 최초의 메가플렉스였다. 스테이트 오브 아트 수준의 영사장비와 음향시설을 갖췄다. 누가 지나갈 때 다리를 움츠리지 않아도 됐다. 좌석은 널찍했고, 좌석마다 팔걸이까지 있었다. 앞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경사가 졌다. 높이 10m에 너비 29m짜리 스크린도 있었다.

그러나 관람료는 예전 그대로였다. 비용을 낮출 방법을 찾다 보니 '영화관이란 이런 거야'라는 상식에 도전했다. 영화관은 모름지기 시내 번화가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네폴리스는 외곽에다 지었다. 물론 시간은 꽤 걸리지만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그야말로 관객에게 '급진'으로,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을 제공했다.

관객은 버르트 가문에 톡톡히 보답했다. 키네폴리스를 선보인 바로 그 첫해에 브뤼셀 영화 시장의 50%를 차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화 산업 자체를 재생시켰다. 영화 관객이 40%나 더 늘어났다. 물론 대부분은 키네폴리스의 열렬한 팬이 됐다.

실상 알버르트 버르트의 혁신은 이것이 처음 아니었다. 1970년엔 상영관 두 개를 넣은 듀플렉스, 1971년에는 최초로 세 개짜리 트리오스쿠프를 개관했다. 1975년에는 상영관 다섯 개짜리 펜타스쿠프를 열었다. 1981년 상영관 10개짜리 데카스쿠프를 지을 무렵 멀티플렉스는 이미 진화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1988년 세계 최초로 메가플렉스를 선보인다. 이게 키노폴리스였다.

실상 알버르트 버르트는 2002년 4월에 작고했다. 그가 키운 기업, 버르트 클레이즈는 성공을 기념하는 듯 키네폴리스로 이름을 바꿨다. 지금 영화관 111개, 스크린 1079개, 좌석 20만개를 운영하고 있다.

요즘 가장 어려운 비즈니스 가운데 하나가 영화관임은 분명하다. 뜬소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저런 매각설도 나온다. 그러나 이 비즈니스는 그동안 수십 번 모습을 바꿨고, 이번에도 누군가는 그렇게 할 것으로 보인다.

알버르트 버르트의 혁신궤적을 늘리건 새로 찾건 시장은 분명 그 누군가에게 보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버르트 버르트의 혁신궤적 끝에 서서 상상해 본다.

전자신문

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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