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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2030 세상보기] 디스토피아는 이미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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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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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킹덤’과 더불어 자주 회자되는 작품은 ‘이어즈 앤 이어즈’다. 이 드라마는 근미래 디스토피아 SF물로, 영국 맨체스터에 살고 있는 라이온스 가족을 중심으로 이미 우리가 지나온 2019년부터 아직 경험하지 못한 2029년까지를 암울하게 그려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중국과의 분쟁으로 홍샤다오라는 지역에 핵미사일을 쏘고, 그 여파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을 것 같았던 라이온스 가족의 삶도 바뀐다. 영국에서도 트럼프와 비슷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사업가 출신의 정치인 ‘비브 룩’이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심지어는 총리로 당선된다. ‘이어즈 앤 이어즈’는 지금 세상이 단단히 잘못돼 있다는 경고이자, 이대로 있다가는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예언이다.

알 수 없는 생명체가 나타난다는 설정의 아포칼립스물보다 이 작품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던 건, 디스토피아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이미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어 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경고 문자가 울리며, 이 상황이 언제 종식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나는 율라 비스의 책 ‘면역에 관하여’에 등장하는 이 문단을 매일매일 떠올린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썼다. ‘오늘날 종말은 장기 시리즈물이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아니라 ‘지옥의 묵시록, 지금부터 계속되는’인 것이다. 종말은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에게 이 사회가 디스토피아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최근 코로나19와 함께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n번방’ 사건이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남겨 집단으로 유포하고 시청한 이 사건에는 약 26만명이 연루되어 있다.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 공개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청와대 청원 글에는 약 200만 명이 동의한 상태다. 여성들은 이것이 독립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내가 지난 8월 이 지면에서 리얼돌을 비판하며 쓴 칼럼 중 언급된 모든 일들, 그러니까 여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하는 일, 여성들의 얼굴에 나체를 합성해 ‘지인 능욕’ 계정을 만드는 일, 대학에서 같은 학번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일은 이번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다. 버닝썬 게이트와 승리와 정준영,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과 양진호, 아동ᆞ청소년 성 착취물유포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도 마찬가지다.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여성들은 분노하지만, 범죄자들에게 강력한 처벌이 내려지지도, 잘못된 성 문화가 바뀌지도 않는다. 여성들은 이 사회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 착취가 그렇게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걸 계속해서 확인한다.

며칠 전에는 n번방 운영자들이 수사를 받고 있는 와중에도 n번방에서 제작된 영상을 SNS로 판매하던 남성이 검거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모 제약 기업 회장의 장남이 자신과 성관계한 여성들을 불법 촬영해서 SNS에 올렸지만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는 뉴스도 봤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n번방에 관해 “호기심 등에 의해서 이 방에 들어왔는데 막상 보니까 적절치 않다 싶어서 활동을 그만둔 사람,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이 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뉴스도 봤다. 이런 소식을 계속 접하게 되는 한, 언젠가 코로나19가 종식되더라도 여성에게는 쭉 디스토피아 같은 날들일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 착취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수치이며 인간 전체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임을, 그것이 곧 디스토피아의 모습임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

황효진 콘텐츠 기획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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