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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생애 가장 끔찍했던 3월" 밭까지 갈아엎게 만든 코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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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에서 마늘을 키우는 문창오(52)씨가 가격 폭락으로 수확도 못하고 밀어버린 마늘 밭을 보여주고 있다. 문씨는 "마늘 가격이 폭락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수확도 못하고 폐기시켜버렸다"고 말했다./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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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처럼 기른 마늘을 수확도 못 하고 모두 밀어버렸어요. 지난 3월은 내 생애 가장 끔찍했던 달입니다.”

지난 1일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국내에서 가장 빨리 햇마늘을 수확하는 곳이다. 20년간 마늘 농사를 해온 문창오(52)씨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약 2만㎡(약 6000평)쯤 되는 문씨의 마늘밭 3분의1 에선 예초기로 반쯤 쳐낸 마늘 줄기가 허리가 꺾인 채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문씨는 “남은 마늘도 곧 쳐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마늘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는 대정읍에선 트랙터 바퀴 자국 아래 짓이겨진 마늘 잔해가 밭마다 가득했다.

올 봄 마늘 값은 수확 인건비도 못 건질 정도로 폭락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남도마늘 같은 난지형 마늘의 ㎏당 산지 가격은 1400원이다.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3분의1 수준에 불과하다. 유난히 따뜻한 겨울 덕에 마늘 생산량은 늘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식당과 학교 급식 등 주요 수요처가 타격을 받으면서 소비량은 줄었다. 이 때문에 올해 3월 전국적으로 갈아엎은 마늘 밭이 전국적으로 511.6만㎡(155만평)에 달한다. 예전같으면 밭을 갈아 엎고 새로 파종을 하겠지만, 이번엔 그마저 여의치 않다. 외국인 근로자나 노인 등 농촌의 주요 노동력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제때 공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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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의 800평 규모 마늘 밭 모습. 수확도 하기 전에 트랙터로 밀어버려 마늘 잔해만 가득하다./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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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은 늘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소비는 적어

전남 신안군 임자면에서 5만㎡(약 1만5000평) 대파밭을 경작하는 김정원(51)씨는 지난달 밭의 70%를 폐기했다. 수확한 대파는 작년의 절반 값도 못 받고 넘겼다. 김씨는 “지금은 수확하는 데 드는 인건비가 그대로 적자”라고 말했다. 올 3월 대파의 도매가는 ㎏당 914원으로 평년 대비 55%가량 하락했다.

농민들은 따뜻한 겨울이 야속하기만 하다. 작년 따뜻했던 겨울 때문에 생산량이 늘어 재고가 쌓여 있는 상황에서 올해 겨울은 더 따뜻해 공급과잉이 발생했다. 마늘의 경우 올해 전국 재배면적(2억5090만㎡)이 작년보다 9.4% 줄어들었건만, 생산량은 2% 더 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판로를 막았다. 제주 대정읍에서 마늘 밭을 경작하는 김은준(52)씨는 “이맘때쯤이면 내륙에서 산지 유통상인들이 직접 찾아와 밭 단위로 수십만평씩 사갔는데 올해는 한명도 못 만났다”며 “코로나 때문에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연간 9000억원어치의 농산물이 공급되던 학교 급식마저 개학 연기로 중단된 것이 농가엔 큰 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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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4일 전남 신안군 임자면에서 트랙터가 대파 밭을 밀어버리고 있는 모습/임자농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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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악재, 5월 농번기 인력수급난

다가오는 5~6월 농번기에는 또 다른 고비가 찾아온다. 수확과 파종 등 사람 손 쓸 일이 많지만, 코로나 사태로 외국인 노동자 구하기가 어렵다. 전남 신안군에서 지역농가에 인력을 공급하는 ‘작업반장’일을 하는 부광철(52)씨는 “작년까지만 해도 태국인 10명을 데리고 일했는데, 코로나 사태로 떠나버리고 이제 3명 남았다”며 “외국인 계절근로자 입국도 지연되고 있고, 요즘은 불법체류하던 외국인들도 코로나가 무서워 자진출국한다”고 말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불법체류 외국인 중 자진신고를 출국한 사람이 2월 초까지는 매주 1000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코로나가 급격히 확산한 2월 마지막 주에는 5000명을 넘어섰다. 제주에서는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는 자진출국 신고를 하러 온 불법체류 외국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까지 연출됐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줄자 이번에는 각 농가에서 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면서 인건비마저 크게 오르고 있다. 부씨는 “작년 외국인 근로자 일당이 7만~8만원이라고 하면 올해는 10만원까지 올랐다”며 “엎친 데 덮친 걸 넘어서 뒤집혀버린 수준”이라고 말했다.

◇“2차 추경에 농업부문 피해대책도 반영해라”

지방자치단체나 이마트·롯데마트 같은 민간 유통업체에서 국내 농수산물 소비 진작을 위해 대규모 물량을 매입하고 판촉행사를 벌이며 지원하고 있지만, 농가에선 역부족이라 말한다. 외통수에 몰린 농업계에선 “정부의 농업 피해대책이 미흡하다”며 “1차 추경에 반영되지 않은 농업부문 피해대책이 2차 추경에는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고 호소한다. 농업인 단체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지난달 18일에 성명을 내고 “정부가 농업 분야의 피해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이른 시일 내에 코로나19 사태가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2차 추경의 길을 열어 놓은 만큼 이를 반드시 반영하고, 그 과정에서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농업 분야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대책이 중점적으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마늘·대파 농사가 무너지게 놔두면 농산물 시장의 도미노 붕괴가 시작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지역농협 관계자는 “농민들은 경작하던 작물이 심각하게 망하면 다른 대체작물을 키운다”며 “지금처럼 소비가 줄어든 상황에서 다른 작물 공급이 늘어나면 또 비슷한 상황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마늘 같은 경우 작황과 가격 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상황이 심각해지면 보통 5월 말쯤 이뤄지는 정부 수매계획을 앞당기는 것 역시 검토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안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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