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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23) '타짜'와 승부를 돕는 식사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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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어떤 메뉴가 도박의 백전백패를 이끄는가

조선일보

영화 ‘타짜’ 등장인물들은 싸구려 위스키나 홀짝일 뿐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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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빠가 화투를 그렇게 쳤대요. 벌어 놓은 돈 다 까먹고, 허리 디스크 심해져서 일도 못 하고." 여섯 살 때였던가, 잠결에 우연히 한마디 주워들었다. 화투도 디스크도 몰랐지만 돈은 아니까 망했다는 사실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 들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부엌에 연탄 아궁이가 있는 5층짜리 주공아파트 단지에서는 종종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어머니들끼리 집에 오가고 음식도 나눠 먹는 등, 멀쩡히 왕래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없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언제나 같은 이야기가 돌았다. 화투를 그렇게 쳐서 돈도 다 까먹고 일도 못 하고.

화투가 소재인 '타짜'(2006년)는 신기한 영화다. 러닝타임이 2시간 19분으로 길지만 도박을 둘러싼 심리전부터 칼로 찌르고 도끼로 찍고 망치로 내려치는 극심한 폭력, 심지어 자동차 액션 등 온갖 장르를 한데 잘 아울렀다. 덕분에 딴생각을 할 여지가 없을 만큼 영화 내내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런 가운데 거의 아무도 아무것도 먹지 않아 신기하다. 잃으면 잃어서, 따면 따서 그저 그런 위스키나 홀짝인다. 고광렬(유해진)은 고니 대신 돈을 전하러 고니네가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 짬뽕을 먹는다. 고니와 광렬이 세란, 화란과 더블 데이트로 극장에 가서는 팝콘이나 몇 점 주워 먹는다. 그게 전부다.

음식 자체가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하는 점도 신기하지만 도박판의 '퍼포먼스'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점도 이해가 안 된다. 억에서 십억 단위 거금은 물론 귀나 손목 등 신체 일부까지 거는 생사의 도박판을 이렇게 안이하게 대처할 수 있단 말인가? 다들 공평하게 아무것도 안 먹고 화투를 치기로 합의라도 한 걸까? 게다가 도박과 음식은 원래 관계가 깊다. 빵 두 장 사이에 햄이나 치즈, 채소 등을 끼워 먹는 음식인 '샌드위치'의 유래는 굳이 구구절절 늘어놓기가 겸연쩍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4대 샌드위치 백작인 존 몬터규가 카드 게임 중 자리를 뜨지 않고도 식사할 수 있도록 분부를 내려 고안한 음식이라는 사연 말이다.

물론 몇 백 년 묵은 사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적 도박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는 온갖 위락 시설이 카지노를 에워싸 질펀한 체류를 보장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숙박비 및 식대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유명 셰프의 브랜드도 진출해 레스토랑을 연다. 단순한 도박장이 아닌 관광지로 설비를 충실히 갖춰 명성을 세탁하는 한편, 어차피 돈을 잃을 가능성이 높으니 방문객을 잘 먹이고 재워 불만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인간이 부실하게 먹거나 아예 식음을 전폐해 쓰러지거나 죽는 불상사를 방지하겠다는 의도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도박은 폐인으로 가는 특급열차 아닌가. 대박을 터뜨려 팔자를 고쳐 보겠노라는 집념에 휩싸이면 음식 같은 건 생각도 못 할 수 있다.

단순히 돈만 놓고 오락으로 벌이는 도박도 호화롭고 편안한 시설이 완비된 관광지에서 잘 먹고 마시며 즐긴다. 하물며 적발을 피해 몰래 숨어 손발까지 걸고 하는 거사라면 타짜든 아니든 좀 더 섬세하고 지혜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영화에서처럼 그저 그런 양주나 홀짝거리지 말고, 좀 더 체계적으로 잘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무엇보다 집중력이 좋아지며 절제력을 제대로 발휘해 감정을 통제하는 한편 찰나에 거대한 손실을 불러일으킬 결정을 피할 수 있다.

일단 음식보다 음료가 더 중요하다. 물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이니 어떤 경우라도 충분히 마셔줘야 한다. 도박도 예외가 아니다. 커피와 녹차 같은 음료는 적절히 마실 때 카페인이 기억력과 집중력을 향상시켜 주는 한편 미약하나마 고통도 경감해 준다. 다만 많이 마시면 지나치게 각성되어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 방해되니 주의한다. 도박과 떼려야 뗄 수 없을 것 같은 술은 알코올이 판단력이나 순발력을 둔감시키니 진정한 승부사라면 멀리하자.

도박의 맥락에서 잘 먹기는 일상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일상에서는 대체로 붉은 고기류를 배불리 먹으면 잘 먹었다 여기지만, 그렇게 배를 잔뜩 채우고 승부에 임했다가는 백전백패로 돈도 손발도 다 잃을 것이다. 일단 식곤증이 찾아올 것이며 한참 동안 속이 더부룩할 수도 있다. 따라서 붉은 고기보다는 생선류, 특히 고등어처럼 기름기가 많은 등 푸른 종류가 바람직하다. 오메가3 지방산이 기억력과 기분을 향상시켜 준다. 여기에 근육 통제에 쓰이는 신경전달물질이 가장 많이 함유된 채소 브로콜리를 곁들이면 타짜를 위한 완벽한 식사 한 끼가 된다. 덧붙이자면 식사 시점도 중요해서, 어떤 메뉴를 고르더라도 충분히 소화된 시점에 승부에 임할 수 있도록 미리 먹고 준비한다.

조선일보

마지막으로 실전에서는 적절한 간식으로 허기를 면하고 정신과 육체를 적절히 가다듬는다. 인체가 합성하지 못하는 지방산인 EPA와 DHA를 공급해 순간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호두,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기분을 향상시켜 주는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분비를 돕는 마그네슘이 함유된 초콜릿, 안토시아닌이나 레스베라트롤 같은 항산화 물질로 기억력과 집중력을 5시간까지 향상시켜 주는 블루베리 등이 좋다. 간식은 퍼포먼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한편, 마치 느슨하게 승부에 임하는 것처럼 보여 상대방의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전략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파심에서 사족 하나. 영화를 보고 재미 삼아 어울릴 만한 음식을 생각해 보았을 뿐, 도박은 절대 옹호·장려해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비록 '타짜'를 재미있게 보지만 나는 화투 패를 전혀 읽을 줄 모른다. 모든 종류의 사행성 놀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환경에서 자라 지금도 같은 태도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행이나 한탕 같은 것도 바라지 않는 가운데, 그나마 올해 들어 매주 토요일 아침 신문과 함께 사는 로또 5000원어치가 유일한 일탈이다. 아주 가끔 5000원에 당첨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소개한 음식은 마음껏 즐기되 도박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말자.


[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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