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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아무튼, 주말] 호크니도 꽃그림 랜선 공개… 코로나 시대 '디지털 꽃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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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도 꽃은 못막아

2020년, 봄이 후각을 잃었다. 봄의 서곡(序曲)은 코끝으로 밀려오는 꽃향기건만 코로나가 꽃향기를 밀어낸다. 종일 마스크에 감금당한 코는 입 냄새에 마비된 지 오래. 야외에서 봄 향기를 맡을 겨를도 많지 않고, 잘 맡아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봄의 인력(引力)은 불가항력. 코로나 시대, 곳곳에서 새로운 상춘 풍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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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②③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프랑스 노르망디 격리 중 정원의 꽃과 나무를 아이패드로 그려 인터넷으로 공개한 그림. 4지난 1일 송파구청이 유튜브로 진행한 석촌호수 ‘랜선 벚꽃 중계’ 장면. /데이비드 호크니·유튜브 캡처, 일러스트=안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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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수난 시대, 그래도 꽃?

사시사철 꽃 사랑이 멈추지 않는 서구에 비해 한국인의 꽃 사랑은 유난히 계절을 탄다. 봄꽃 편애가 심하다. 봄이면 우르르 쏟아지는 상춘객이 올해는 바이러스 전쟁에서 주적으로 지목받았다.

극약 처방이 나왔다. 봄꽃 축제의 대명사 진해 군항제, 매년 관광객이 30만명 이상 방문하던 삼척 맹방 유채 꽃축제는 아예 취소했다. 그럼에도 상춘객이 몰리자 삼척시는 지난 3일 5만5000㎡(약 1만6000평) 유채꽃밭을 갈아엎었다.

궁여지책으로 나온 게 '꽃놀이 타이밍제'다. "9시부터 호수를 전면 폐쇄할 예정입니다. 방문객 여러분은 밖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5일 일요일 오전 8시 50분,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꽃을 하나라도 더 담기 위해 뒷걸음질하며 셔터를 눌러댔다. 석촌호수는 코로나 확산 방지 때문에 지난달 28일부터 폐쇄됐다. 꽃이 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주말까지, 오전 5시부터 9시까지 4시간만 문을 개방한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꽃 구경을 하려고 꼭두새벽부터 사람이 몰린다.

바이러스 청정 지대, 디지털 꽃놀이

'디지털 꽃놀이'는 코로나가 낳은 새 풍경. 국경을 넘나드는 '랜선 꽃 감상'이 이뤄진다.

"기억하세요. 무엇도 봄이 오는 걸 막지 못합니다(Do remember they can't cancel the spring)." 지난 1일 현대미술 거장인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3)가 BBC를 통해 아이패드로 그린 꽃 그림을 공개했다. 영국 서섹스의 집을 떠나 프랑스 노르망디 별장에서 머물던 호크니는 코로나 창궐로 격리됐다. 마당의 샛노랗게 물든 수선화, 연둣빛 싹을 틔운 나무를 아이패드 화폭에 담았다. 생존 화가 중 작품 값이 최고인 거장의 작품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소셜미디어를 타고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진 속 호크니는 캔버스를 앞에 두고 정원에 앉아 해맑게 웃고 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지만 바보처럼 자연과 떨어져 있었어요." 노장의 그림과 메시지가 코로나에 멍든 사람들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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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영국 BBC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진을 공개했다(위). 데이비드 호크니가 아이패드로 그린 수선화. /데이비드 호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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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꽃 대신 예술 작품으로 하는 '디지털 꽃 전시'도 등장했다. "이 사과꽃 그림이 당신의 하루를 밝게 만들어주길. 이 '#MuseumBouquet(#미술관 꽃다발)' 캠페인으로 오늘 당신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달 25일 뉴욕 최초의 박물관인 뉴욕 역사 협회(New York Historical Society)가 사과꽃을 그린 그림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 그림부터 코로나바이러스로 문을 닫은 미술관 사이에서 '#MuseumBouquet' 해시 태그 릴레이가 시작됐다. 꽃을 주제로 한 회화·조각·사진·옷 등을 올리고 다른 기관을 태그하는 것. 트위터에서 해당 해시 태그를 검색하면 따뜻한 안부와 함께 미술관들이 올린 가지각색 꽃 작품이 넘실거린다. 북미를 중심으로 퍼진 이 캠페인은 전 세계 300곳 이상 미술관에서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는 지자체의 '랜선 벚꽃 생중계'가 등장했다. 마포구는 3일 '안방에서 즐기는 랜선 벚꽃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벚꽃 중계에 나섰다. 1시간 넘게 드론과 고화질 카메라로 경의선 숲길 벚꽃을 화면에 담았다. 리포터가 "○○님께서 '벚꽃 영상 화질이 장난 아니네요'라고 댓글 남겨주셨네요"라며 시청자들과 소통했다.

송파구는 1, 3, 8일 세 차례에 걸쳐 유튜브 '방구석 벚꽃 live'를 진행했다. 댓글로 원하는 벚꽃 장면을 남기면 마스크를 쓴 리포터가 석촌호수를 걸으며 보여주는 방식. 모니터 너머로 텅 빈 호숫가에 벚꽃잎이 흩날리는 중계는 1만회 가까이 조회됐다.

야외 꽃놀이 대신 방구석 꽃놀이

"집에 오면 마스크부터 벗고 목마가렛(국화과 식물) 향을 맡아요. 달콤한 꽃향기에 그제야 봄이 느껴져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집 밖에서 봄을 즐기지 못한다면 집으로 봄을 들이면 된다. 김서희(가명·42)씨는 코로나 사태 이후 양재 꽃시장에서 화분을 사 오기 시작했다. "예전엔 꽃 키울 시간도 없고 벌레 생기는 것도 싫어 꽃은 관심 밖이었다. 재택근무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물리적 여유가 생겼다"며 웃었다. "종이꽃, 기린꽃처럼 손톱만 한 꽃이 피어나는 모습에서 위안을 받아요. 풀꽃의 생명력이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를 이길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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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강원 삼척시는 상춘객을 막겠다고 유채꽃밭을 트랙터로 갈아엎었다(위). 지난 5일 오전 8시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는 벚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뉴시스·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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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 꽃놀이가 제한되면서 집 안 꽃놀이를 즐기려는 이가 늘었다. 신선 식품 배송 업체 마켓컬리는 지난 2월부터 튤립을 팔기 시작했다. 밤 11시 이전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 배송'으로 집 앞에 싱싱한 튤립이 도착한다. 마켓컬리 측은 하루에 튤립 500상자 정도가 꾸준히 팔린다고 밝혔다.

직장인 이모(43)씨도 새벽 배송으로 튤립을 네 차례 시켰다. 이씨는 "재택근무 두 달째인데, 책상에 튤립을 가져다 놓으면 예술 작품 같아 기분 전환이 된다"고 했다. "넷플릭스 보는 대신 꽃 보면서 '멍 때리기'도 하고요. 사람을 못 만나는 대신 자연에서 '힐링' 받아요." 다섯 송이에 1만2900원, 열 송이에 1만9900원. "농가도 돕고 마음도 힐링하니 일석이조 같아요."

옴짝달싹 못 할 때도 꽃은 자란다

꽃이 코로나 블루를 날리는 데 실제로 효과적일까. 백종우(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재난정신건강위원장은 "꽃이나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키우는 '원예 치료'는 정신과 임상 현장에서 쓰는 치료법 중 하나"라고 했다. 백 교수는 "최근 집에서 꽃을 키우며 마음이 안정된다는 환자가 늘었다"며 "감염 재난으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는 지금 같은 시기에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추천할 만한 방법"이라고 했다.

지난 7일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는 '코로나 사태가 오래가며 국민 10명 중 2명은 주변의 관심이 필요한 정도의 불안·우울 증상을 겪는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화초를 키우며 심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생산적 돌봄'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 행복감을 더해준다"고 했다. 물을 주며 식물이 조금씩 자라나는 것을 보며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누군가를 돌보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타적 행위를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데, 식물을 키우는 일이 그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2017년 이탈리아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을 인용해 "1인 가구에서 특히 식물이 주는 스트레스 회복 효과가 크다"고 했다. "식물로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정해져 있는데, 가족과 함께 살면 가족이 주는 스트레스가 식물이 주는 행복을 깎아 먹는다. 반면 1인 가구에선 온전히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끔은 말 못 하는 꽃이 가족보다 나을 때도 있다.


"휴지 말고 꽃 사세요!" 꽃 왕국 네덜란드의 절규

코로나로 멈춘 네덜란드 꽃시장

네덜란드에서는 지난달부터 '휴지 대신 꽃을 사자(#BuyFlowersNotToiletPaper)' 캠페인이 시작됐다. 네덜란드 회사 1000여곳이 동참해 꽃을 사 직원과 이웃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북미와 유럽에서 코로나 공황으로 두루마리 휴지가 동났다는 건 유명하다. 그런데 꽃은 왜 사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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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꽃 시장인 네덜란드에서 ‘휴지 대신 꽃을 사자(#BuyFlowersNotToiletPaper) 캠페인을 하고 있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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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돈이다.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꽃 시장이다. 꽃은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한다. 실핏줄까지 뜨끈한 혈액을 실어나르는 심장처럼 네덜란드는 세계 각지로 매년 67억달러어치 꽃을 수출한다. 세계적으로 판매되는 꽃 상품의 절반은 네덜란드 몫. 특히 꽃 구근의 77%는 이 나라에서 왔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운송과 거래가 정지되며 네덜란드 알스메이르도 멈췄다. 알스메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 경매장이 있는 도시다. 채 시들지 않은 색색의 튤립과 장미가 쓰레기차에 폐기되고 있다. 세계 최대 꽃 경매업체 '로열 플로라 홀랜드' 측은 "꽃 거래량이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70% 가까이 떨어졌다. 추정 손실액은 20억유로(약 2조6500억원) 이상"이라고 가디언에 밝혔다.

'꽃 대장' 네덜란드가 멈추자 거미줄처럼 연결된 세계 꽃 시장이 얼어붙었다. 6000㎞ 떨어진 아프리카 대륙의 케냐도 타격을 입었다. 케냐는 네덜란드, 콜롬비아, 에콰도르에 이어 세계에서 넷째로 큰 절화(折花·줄기를 잘라 파는 꽃) 생산국. 아프리카 최대 꽃 수출국이다. 문제는 케냐 장미 농장에서 키워 자른 꽃의 70%는 유럽에 팔린다는 것. 대부분의 거래가 네덜란드 꽃 경매장을 거친다. 케냐에서 꽃은 차(茶) 다음 효자 수출 품목이다. 2017년 케냐는 6억8000만달러(약 8300억원)어치 절화를 해외에 팔았다.

국내에서도 어려운 화훼 농가를 돕기 위해 '플라워 버킷(꽃바구니) 챌린지'가 이어지고 있다. 꽃을 사고 소셜미디어에 인증 사진을 올린다. 다른 사람을 지목해 꽃을 선물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소비자 물가 동향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로 졸업식이 취소되며 2월 생화 가격은 전월 가격에서 11.8% 떨어졌다. 입학식과 각종 행사가 무산되며 3월 꽃값은 다시 2월 가격보다 12.8% 하락했다.

[조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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