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아무튼, 주말] “한국으로 탈출해서 널 찾을게” 北유도 영웅은 기차서 뛰어내렸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변희원기자의 한 點] ‘사랑의 불시착’ 현실판 주인공… 유도 대표팀 트레이너 이창수

조선일보

이창수(53)씨 아내 진영진(56)씨는 네 번 만난 남자와 결혼한 것을 ‘미친 짓’이라고 했다. 이씨는 “아내가 말은 저렇게 해도 원래 내 팬이었다. 내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까지 만들어 입고 다녔다”고 말했다. 국제대회에서 북한 선수단이 무시당할 때 유일하게 다가와 웃어준 여자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과 같은 러브 스토리, 현실판이네요.”

북한 유도 남자 선수 이창수(53)씨와 대만 유도 여자 선수 진영진(56·陳鈴真)씨의 러브 스토리가 지난 2월 유튜브에 등장하자 조회 수는 하루 만에 20만을 넘었고, 9일 현재 47만을 기록했다. "목숨을 건 로맨스" "드라마에서 나온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등 한국어와 중국어가 섞인 댓글만 770개다.

각각 북한과 대만에서 유도로 인정받은 두 사람은 1989년 베오그라드(당시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1991년 바르셀로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이씨는 진씨에게 "탈북한다,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길에 탈출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한국에서 결혼한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스위스에서 처음 만난 북한 장교와 남한의 재벌 2세가 사랑을 이루는 데서 끝났지만, 이씨와 진씨의 드라마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씨는 현재 둘째 아들 문진(25)씨가 소속된 한국 유도 국가대표팀의 트레이너다. 셋째 아들 위진(23)씨도 실업팀에 소속된 유도 선수다. 이씨와 진씨의 러브 스토리를 유튜브에 공개한 건 첫째 아들 호진(27)씨. 그 역시 대학 때까지 유도 선수로 활동하다가 최근 한 자동차 회사의 중국어 통역 담당으로 취직했다. 다섯 식구가 모두 유도를 하는 유도 가족이다.

남한 선수에게 지자 바로 탄광행

조선일보

1990년 중국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만난 진영진(왼쪽)씨와 이창수씨.


이씨는 196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유도를 하면 운동화를 받을 수 있다"는 코치의 말에 열한 살에 유도를 시작했다. 학교 졸업 후 평양시 체육회 유술단에 들어갔다. 8년 동안 국제대회 메달만 17개를 따내 북한에서 공훈체육인 직위까지 받았다. 1990년 남한의 정훈(전 국가대표 감독) 선수와의 대결을 다룬 당시 국내 기사에서 그는 '세계 3위의 유도 강자(强者)'로 소개가 될 정도로 세계적 강자였다.

―'사랑의 불시착'을 봤는지.

"아니요. 주변에서 얘긴 많이 해서 알고 있어요. 저는 북한에서 먹고살 만했어요. 아내와 결혼하려고만 탈북한 것도 아니고요. 나중에 내 아이를 여기(북한)에서 낳아 키울 수 없겠다는 생각에 나온 거죠.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 수 없는 곳이니까요."

―북한의 '유도 영웅'이었다던데.

"198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동메달을 따내자 공훈체육인이 됐고 노력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메달 덕분에 일본의 한 국제대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제가 아니라 일본에 가족이 있는 선수가 참가했어요. 그 선수는 일본의 가족에게 돈이나 물자를 받아올 수 있다면서. 너무 화가 났는데 다른 일이 또 터졌죠.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남한의 정훈 선수와 맞붙었는데 제가 져서 은메달을 땄어요. 남한 선수에게 졌다는 이유로 삼진 탄광에 가야 했습니다. 당과 지도자 동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범죄라더군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요?

"남한 선수에게 지면 무조건 벌을 받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앞으로 맞붙을 상대가 자기보다 잘하는 남한 선수라는 걸 대진표에서 확인하면, 그전 시합에서 미리 져버려서 아예 대결을 피해요. 저는 정훈의 팔을 하나 뽑아버릴 각오로 했어요. 시합 때 정훈의 팔 관절을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꺾어버렸는데, 그는 한쪽 팔이 꺾인 채로 저를 매달고 일어섭디다. 다음 날 사우나에서 만난 정훈의 팔이 엄청나게 부었더라고요. '안 아팠냐, 항복하지 그랬냐'고 물었더니 '형한테 져서 금메달 못 따면 군대 가야 해요'라고 하던데요. 북한의 탄광보다 남한의 군대가 더 무섭다고 해야 하나(웃음)? 둘 다 절실했던 거죠."

― 정훈 선수와는 탈북 후 만났나요?

"네, 탈북 전에는 남한에 오면 집 한 채 사주겠다더니, 탈북 후에는 그 얘길 않네요. 허허."

―탄광에 갔는데 어떻게 탈북했죠?

"탄광에는 잠깐 있었고, 그 뒤에 보일러실에서 일했어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또 따려면 제가 필요하니까 복귀를 시켜줬지만, 저는 이미 탈북 결심을 했어요. 1991년 바르셀로나 세계대회 때 경기는 안중에도 없었고, 탈북하려고 머리를 굴렸죠."

이씨는 1991년 8월 4일 탈북에 성공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국민대학교 체육학과에 편입했고, 1년 뒤 진씨와 결혼했다. 대학 졸업 후 마사회 보안과에 취직했다가 마사회 유도팀이 생기자 트레이너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일보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묻자 이창수씨는 입을 닫았다. 평양에 살던 가족들이 좋지 않은 곳으로 쫓겨났다는 얘기를 예전에 들었단다. 그는 “어머니한테 우리 세 아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아내와는 탈북 전에 알고 지냈죠?

"1989년 제가 동메달을 딴 그 대회에서 처음 봤어요. 한판으로 계속 이긴 제 경기를 본 아내가 먼저 말을 걸었죠. 말은 안 통하지만 서로 인사하고 장난치면서 친해졌어요. 북한 선수단은 성적이 안 좋은 데다 가난하니까 인기가 없었어요. 저를 좋아한 유일한 선수인데 저도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이듬해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아내가 전기면도기, 담배 같은 걸 제 선물로 가져왔어요. 아내와 베이징을 돌아다니고 북한 식당에도 가며 데이트를 했죠."

―탈북 계획을 알렸나요?

"네.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아내가 북한의 간부들에게 인사를 하기에 '다시는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 인사 안 해도 돼, 나 탈북할 거야'라고 했어요. 아내는 '너무 위험하다'고 탈북을 말리면서도 저한테 300달러를 건네줬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도망쳤나요?

"그때 북한 선수들이 유럽 경기에 참가할 때 돈을 아끼기 위해 가는 편은 비행기를, 돌아오는 편은 기차를 탔어요. 바르셀로나발(發) 기차를 타면 파리에서 갈아타는데 그때 탈출하려고 했어요. 제가 파리의 한국 대사관에 전화해 탈북 의사를 전한 걸 북한 대사관에서 알게 됐어요. 파리에서 선수를 집합시키더니 탈출을 도모하는 자가 있으니 무조건 3인 1조로 다니래요. 일단 기차에 탄 뒤 베를린에서 5분간 정차하는 기회를 노렸죠. 같은 칸에 탄 코치는 제가 갖고 있던 인삼주랑 뱀술을 먹여서 재웠고, 기차가 베를린역을 막 출발할 때 뛰어내렸어요. 한국 대사관으로 냅다 달렸죠."

아내 진씨는 이씨와 결혼하기 위해 고향 대만을 떠났다. 요리를 좋아해서 조리 자격증을 땄고, 현재 유치원에서 조리사로 일한다. 이씨는 중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지만 진씨의 한국어는 유창하다. 대만 유도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딴 뒤 은퇴했다.

―탈북 후 아내를 찾아갔나요?

"한국에 온 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직원이 저를 데리고 경주·포항 같은 지방을 돌며 견학을 시켰어요. 대만 신문에서 제 탈북 기사를 본 아내가 그 기간에 한국으로 저를 찾아왔다가 허탕만 치고 갔죠. 안기부에서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묻기에 결혼할 것이라고 했더니 '한국에 왔으면 한국 여자랑 결혼해야지 왜 외국 여자랑 결혼하느냐'고 했어요. 제가 한국 여자는 무섭다고 대답했어요. 안기부가 아내를 한국에 초청해줘서 다시 만났습니다."

―한국 여자가 왜 무서웠습니까.

"탈북자가 한국에서 결혼 잘못하면 엄청 고생한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게다가 대학을 다니면서 나이트클럽에 가봤는데 처음 본 남녀가 껴안고 춤을 추는 것도 좀 무서웠고요."

―한국에서 재회한 아내의 첫마디가 뭐였나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울기만 했어요."

―네 번 만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무섭지 않았나요.

"이제 남한에 오기 전부터 저를 알던 사람은 제 아내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인 거죠."

유도 하겠다는 둘째 아들 덕에 정신 차려

조선일보

세 아들의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복을 입고 찍은 가족 사진.


이 말을 들은 아내 진씨는 "제가 미쳤었어요, 우리 가족들이 다 반대했는데"라며 웃었다. 이날 안양시에 있는 이씨 자택에는 부부만 있었다. 벽에는 부부와 아들 세 명이 모두 유도복을 입은 가족사진과 '유도 가족의 약속'이라고 적힌 화이트보드가 걸려 있었다. 이씨의 약속은 '운전할 때 욕하지 않기'다.

―가족이 화목해 보입니다.

"네, 지금은 그렇지만 예전엔 힘들었죠."

―직장 생활 때문입니까.

"마사회에선 좋았어요.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남한에 데려와 주겠다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데다 빚보증까지 잘못 서서 남한에서 모은 돈을 잃고 술을 많이 마셨어요."

―알코올중독이었나요?

"보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다 영양실조 판정을 받았어요. 그렇게 몇 년 살다가 간경화에 걸렸고 의사가 곧 죽는다고 할 정도였죠. 아내가 제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려고 정신병원에 세 번 입원시켰어요. 퇴원하고 한 달 지나면 다시 술을 마셨죠."

―어떻게 벗어났나요.

"둘째가 중학교 2학년 때 눈이 벌게져서 집에 들어왔어요. 그날도 저는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걜 보자마자 '너 유도 했지'라고 물었죠. 끄덕이는 아이를 붙잡고 '목 졸렸지?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졸렸다가 풀렸지?'라고 묻자 아이가 '아빠가 어떻게 알아?' 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어요. 저야 딱 보면 알죠. 다음 날 유도 학원에 전화해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관장이 '기술을 가르치려고 목을 졸랐다, 선생님 아들인 줄 몰랐다'고 하기에 '누구 아들이건 간에 아이 목을 그렇게 졸라선 안 된다'고 했어요."

―아들은 아버지가 유도 선수였단 걸 몰랐나요?

"우리의 과거를 한 번도 얘기 안 해서 모르고 있었어요. 제가 방황하는 걸 본 안기부 직원이 아내에게 남편의 마음을 잡으려면 세 아들 중 한 명이 유도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둘째가 유도를 시작했대요. 아들이 유도를 배우는 걸 알게 되니까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단 생각이 들더군요. 보성중학교 유도부 감독에게 둘째를 받아달라고 해서 서울로 전학을 보냈고, 주말에는 제가 가르쳤죠. 그걸 안 회사에서 사내에 이창수 유도 교실을 열어 임직원 자녀를 가르치게 했어요. 아이들에게 유도를 가르치자 자연히 술을 안 마시게 됐습니다."

―첫째와 셋째도 결국 유도를 했죠.

"제가 술 마실 땐 그렇게 아빠를 싫어하던 아이들이 제가 둘째 데리고 운동하러 가자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매트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재밌어 보인다고 첫째와 셋째도 곧 유도를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때만 해도 첫째는 이 동네에서 싸움을 잘하기로 유명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잘됐다 싶어서 도복을 입혀서 바로 보성고등학교로 전학을 시켰어요. 셋째도 보성중학교에서 유도를 했어요."

아들 얘기가 나오자 그는 삼형제의 사진을 보여주며 한참 자랑을 했다. 둘째 아들이 지난해 10월 '2019 아부다비 그랜드슬램' 남자 81㎏급에서 금메달을 딴 이야기, 첫째 아들이 유도 입문 1년 만에 전국체전에서 메달 딴 이야기, 막내아들이 중학교 때 소년 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고 MVP가 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둘째가 지난해 세계 406위였다가 지금 37위까지 올랐다.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하나 더 따야 올림픽에 나간다"고 했다.

―아들 셋 다 유도를 하는 게 자랑스러운가 봐요.

"저는 자식에게 유도를 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나 힘든지 잘 아니까. 그런데 참 신기하죠? 유도를 하면서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 알게 됐어요.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족 모두 유도를 한다는 유대감까지 생겨서 지금 서로 살뜰하게 챙기고 있어요."

―국가대표인 둘째에게 거는 기대가 있나요.

"2014년 마사회를 그만두고 대만의 한 대학 초청으로 유도팀 감독을 했다가 성적이 잘 나와서 2016년까지 대만 유도 국가대표팀 총감독을 했어요. 2020년 도쿄올림픽이 다가오자 '왜 내 자식 놔두고 여기서 남의 자식을 가르치고 있지?'란 생각이 들었죠. 북한이 1984년 LA올림픽과 1988년 서울올림픽에 다 불참해서 저는 한 번도 올림픽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게 언제나 한이었는데, 대표팀에 있는 둘째가 그걸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2017년에 한국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들어갔습니다."

―아들을 위해 이직한 건가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저는 대표팀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도 아들을 더 잘 봐준다는 얘길 들을까 봐 선수촌에선 밥도 같이 안 먹고 옷깃도 안 스치려고 조심하고 있어요."

―자식을 북한에서 키우지 않겠다는 바람을 이뤘네요.

"여기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가꿔 나갈 수 있어요. 신의 가호나 인연의 법칙도 그곳(북한)에선 한계가 있지만…."

―남한에서 30년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뭐든 있을 때 잘 지키세요. 자유든, 사랑이든, 나라든, 가족이든. 여기선 자신이 가진 소중한 걸 지켜야 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이씨의 인생이 드라마와 같다고 했다. 이씨는 ‘유도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유도가 나를 죽일 뻔도 했고, 여러 번 살리기도 했다. 유도 때문에 탄광에도 끌려갔지만, 유도 덕분에 안 굶었고, 탈북했고, 결혼도 했으며 불행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인터뷰의 사진 촬영을 위해 입었던 유도복을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유도복이 내 몸과 같아서 그걸 입을 때가 제일 편하다”며 체육관 밖으로 휘휘 걸어나갔다.

[변희원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