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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기자의 시각] '조작 비망록'의 황당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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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박국희 사회부 기자


"검찰이 진술을 회유하고 불법 수사를 했다면 상식적으로 그런 내용이 담긴 문건을 검찰 스스로 법원에 냈겠습니까?"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 자금 사건을 수사했던 한 현직 검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한 전 총리는 고(故)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에게서 9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판결을 받았다. 최근 여권(與圈)은 '검찰 강요로 허위 진술을 했다'는 내용의 한씨 옥중 비망록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자, 마치 비망록이 세상에 처음 나온 증거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한 전 총리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검찰 내부는 허탈해하는 분위기다. 비망록은 9년 전 수사팀이 처음 입수해 한씨의 위증 증거로 재판부에 제출했고, 법원 역시 검찰 주장을 인정한 문건인데 이제 와서 비망록이 불법 수사의 징표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2011년 6월 9일 법원에서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한씨의 서울구치소 감방에서 해당 비망록을 압수했다. 당시 한 전 총리 수사팀 관계자의 말이다.

"한 전 총리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한씨는 검찰이 질문을 하면 뭘 보고 계속 읽었다. 재판장에게 제지를 요청했지만 한씨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이거 없이는 말을 못 한다'고 하더라. 수사팀은 그게 '위증의 시나리오'라고 보고 영장을 받아 압수했다. 현재 오르내리는 옥중 비망록이다."

당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등 소송 관계인 모두가 비망록을 증거자료로 검토했다. 법원은 비망록에 근거가 없다고 보고 한 전 총리 유죄판결에 반영했다. 하지만 MBC 등 일부 매체는 당시 법원이 압수영장을 발부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10년 만에 드러난 빼앗긴 비망록"이라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10년 전 검토가 끝난 문건을 놓고 "사건의 진실이 10년 만에 밝혀지고 있다"고 흥분했다. 판사 출신인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며 "검찰이 고도로 기획해 증인을 협박·회유했다"고 말했다. 이를 지켜보는 상당수 법조인은 고개를 내젓고 있다.

유일하게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1심 판결문에서조차 비망록은 언급되지 않는다. 무죄를 선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검찰의 협박 내용이 담겼다는 비망록을 사실로 전제하고 검찰 수사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럼 재판은 할 필요도 없이 한 전 총리는 무죄다. 재판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망록에 근거가 없다고 본 것이다.

한씨의 당시 변호인은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이다. 그는 최근 비망록이 새로운 증거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 인터넷 매체와 인터뷰하며 9년 전부터 늘어놓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총선에서 압승한 거대 집권 여당도 동조해 5년 전 끝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국희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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