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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백신 특허? 태양에도 특허 있나?”...코로나19 확산 맞선 지식공유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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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계기로 “지식공유” 목소리 커져
백신과 치료제 인류 공공재로 보급하고 정보 자원 접근성 격차 줄여야


“누가 이 백신의 특허를 갖고 있죠?”,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수 있나요?”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의학자 조너스 소크(1914~1995)는 백신 개발 성공을 알리는 행사 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특허권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소아마비는 주로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가 많이 걸려 붙은 이름이다. 사망률은 1~5% 정도. 소크의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소아마비는 공중보건의 골칫거리였다. 1952년은 미국 역사상 소아마비가 가장 심각하게 확산한 해로 5만8000건의 소아마비가 보고됐는데 그중 3145명이 죽고, 2만1269명이 마비가 됐다. 그러나 소크의 백신 개발 후 2년 만에 미국의 소아마비 발병은 이전 대비 90%나 줄었다. 2000년 한국과 서태평양, 2002년 유럽에서 소아마비의 완전한 종식이 선언됐다. 전 세계적으로 2018년 발생건수가 33건에 불과해 ‘절멸’을 앞두고 있다.

코로나19가 인류를 위협하는 지금, 소아마비와 같은 기적적인 반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변혜진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위원은 “소크가 태양에 특허를 걸 수 있냐고 반문한 것은 새로운 기술의 발견은 인류가 지식을 공유했기에 가능했음을 강조한 말”이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지난 5월 1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73차 세계보건총회(WHA) 이틀째 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번 총회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사상 처음으로 화상회의로 진행됐다.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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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코로나 ‘지식 풀’ 출범

코로나19 방역에서도, 치료제와 백신 개발에서도 연대는 중요하다. 팬데믹은 어느 한 나라가 방역을 잘한다고 해서 퇴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9일 제73차 세계보건총회(WHA)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의안에 ‘지식 풀(Knowledge Pool)’이 포함된 배경이다. 지식 풀은 자발적으로 코로나19의 진단·치료·예방에 사용할 수 있는 특허권 뿐만 아니라 임상시험 자료·진단기기나 치료제, 백신 생산에 사용하는 설계도 등의 정보들을 세계보건기구(WHO)의 공동관리에 맡기고,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용하자는 제안을 말한다. 지식 풀은 5월 29일 국제의약품구매기구(UNITAID) 산하 의약품특허풀(MPP)을 통해 공식 출범한다.

결의안은 코로나19라는 팬데믹에 대응해 “고품질의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필수 보건 기술과 상품에 대한 보편적이고 시의적절하며, 공평한 접근과 공정한 배분을 요청”하며 “이를 위한 불필요한 장애물을 시급히 제거하는” 조치들은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에서 확인한 ‘유연성’ 조항과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유연성 조항은 TRIPS 협정이 공중보건을 위한 의약품 접근을 보장하는 관점에서 해석·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특허의 강제실시나 병행수입 등의 근거가 된다.

의료 분야 특허 전문가인 남희섭 변리사(지식연구소 공방)는 이 결의안에 대해 “문구를 자꾸 약화시키려고 한 미국과 영국의 반대를 뚫은 것은 전체적으로 환영할 만하다”면서 “이제 구체적인 실행, 특히 민간 제약사와 같은 사적 행위자들을 어떻게 참여시킬지가 남은 숙제”라고 말했다. 실제 세계 1~10위 사이의 다국적 제약사가 많은 미국(화이자·머크)·스위스(노바티스)·영국(GSK) 등은 지식 풀에 부정적이었다.

한국 정부는 지식 풀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18일 세계보건총회 기조연설에서 “개발된 백신과 치료제는 인류를 위한 공공재로서 전 세계에 공평하게 보급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대목이 그렇다. 하지만 기조연설로만 평가하기엔 이르다. 변혜진 위원은 “특허보다 생명을 우선하는 연대와 협력을 강조했지만, 국내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내용은 그 연설과 반대로 가는 면이 있다”며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의료보다 재벌 대기업과 대형병원을 위한 바이오산업 강화나 원격의료를 추진하는 것이 그 예”라고 말했다.

남희섭 변리사는 “문 대통령의 말이 공수표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나라가 보유한 특허 중 공적자금을 투입해 확보한 특허를 선별해 풀에 올리는 작업을 선제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며 “질병관리본부에서 확보한 백신 후보 물질이나 공적자금을 지원해 확보한 진단기술을 풀에 채우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먼저 나가야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동참을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픈소스 운동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면서 “많이 참여할수록 배신할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풀을 키우는 작업에 우리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회 전반의 지식공유 활성화 계기로

WHO 지식 풀은 코로나19에 대응한 국제사회 공조를 상징한다. 우석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표(가정의학과 의사)는 이런 공조 체제에 부응하는 국내 여건을 마련하는 한 작업으로 공공제약사 혹은 국영제약사 설립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우석균 대표는 “도하 선언은 공적·비상업적 목적이라면 특허를 미리 쓰고 나중에 적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특허를 강제실시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민간기업은 상대 제약사의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설사 풀로 공유한다고 해도 쉽게 나서지 못한다”며 “그런 점에서 특허권 강제실시를 담당할 수 있는 국영제약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제약사들은 다국적 제약사가 보유한 특허를 강제 실시해 활용하는 걸 꺼려한다. 다국적 제약사의 약을 수입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에게 '찍히면' 향후 약을 공급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특허제도가 기술개발을 장려하는 본래 목적대로 활용되도록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 우 대표는 “특허가 과거엔 개발하는 사람에게 일부 혜택을 줘 기술개발을 장려하는 기능이 있었지만, 지금은 특허가 기술개발을 장려하긴커녕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 기술개발을 방해하는 쪽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 필수의약품의 가격을 높여서 이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특허가 쓰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특허와 지식공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 세계적으로 쓰지도 않을 특허를 헐값에 사 모아놓고 특허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남발해 돈을 버는 ‘특허 괴물(Patent troll)’이나 하나의 제품에 특허를 수백 개 걸어놓고 특허 침해를 못 하도록 만들어 놓는 ‘특허 폭탄(Patent bomb)’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난 몇 가지 사례로도 확인된다. 미국 켄터키주는 3M 등이 보유한 특허 때문에 N95 마스크 생산이 어렵다며 미국 내 생산을 위해 특허의 무상 라이선스를 촉구했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은 인공호흡기가 부족하자 지역의 3차원(3D) 프린팅 업체가 생산할 수 있도록 특허권자에게 설계도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소프트뱅크가 소유한 특허괴물 ‘포트리스’가 페이퍼컴퍼니를 동원해 미국의 코로나19 진단기 제조사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가 여론이 안 좋아 취하한 적도 있다.

이런 특허 악용 사례와 반대로 코로나19와 관련한 지식공유 운동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에 필요한 학술논문, 과학적 연구성과, 데이터 이용은 거의 어려움 없이 모두 이용할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의학협회저널(JAMA)>을 비롯해 <네이처>·<랜싯>·<와일리>·<스프링거>·<뉴잉글랜드저널오브메디슨(NEJM)> 등 세계 유수의 국제학술지와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가 코로나19 관련 논문을 무료 공개했다.

국내 학술논문 플랫폼인 디비피아(DBpia)도 전염병 관련 논문을 무료로 공개했다. 인텔과 페이스북·아마존·IBM·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코로나19 여파를 최소화할 목적으로 관련된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의 무상 이용을 코로나 대유행 종식 선언 1년 후까지 허용하는 ‘오픈 코비드 플레지’를 출범시켰다. 학술 분야를 넘어 원격교육이나 화상회의를 위한 소프트웨어 무료 제공도 이뤄지고 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지식공유 운동이 더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코로사19 사태로 지식과 정보 자원, 교육에의 접근성이 계층에 따라 큰 차이가 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그런 격차를 줄이는 차원에서 지식공유 운동이 더 활발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정환 교수는 그런 점에서 학술정보를 제공하는 한국연구재단이나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국립중앙도서관 등 공공기관이 지식공유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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