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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엔 헬기, 눈앞엔 2m 철망…2020 워싱턴의 ‘초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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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트럼프, 400년 인종차별엔 침묵”

분노한 시민들, 백악관 앞 메운 채

거대 철망·늘어선 군경들과 맞서

“우린 무섭지 않다” 평화시위 독려

미 전역서 더 크게 시위 번지지만

지지층만 보는 트럼프, 혼돈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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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도 워싱턴 백악관 앞에 2일(현지시각) 설치된 240㎝ 높이의 철망을 사이에 두고 헬멧을 쓰고 방패를 든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마주 보고 늘어서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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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미 경찰이 군대처럼 하고 있다. 군인들이 더 온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우리는 무섭지 않고, 여기 있을 거다.”

2일(현지시각) 백악관 건너편 라파예트공원 앞에서 만난 조지타운대 대학원생 마리아 질라(25)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날 지방정부가 폭력시위를 제압하지 않으면 연방 군대를 배치하겠다고 발언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는 “트럼프가 하는 일은 오직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뿐이다. 그는 400년간의 인종차별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자기 기분 좋은 말만 한다”고 말했다.

폭력시위에 “법과 질서”로 대응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시민들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성난 민심에 오히려 기름을 부었다. 이날 저녁 라파예트공원 앞을 중심으로 T자형 도로가 수천명의 시위 인파로 꽉 찼다. 한 외신기자는 “어제보다 훨씬 사람이 늘었다. 월가 점거 때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이슨 존슨(25)은 “트럼프가 무력을 쓴다고 해서 사람들이 더 화가 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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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 앞에서 시민들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전날 없던 검은 철망 너머로 백악관과 워싱턴기념탑이 보인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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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 데릭 쇼빈에게 8분46초 동안 목을 짓눌려 숨진 일은 그 자체로 인종차별과 공권력의 폭력이라는 미국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뒤 벌어지는 상황 또한 초현실적이다. 워싱턴에서의 시위 닷새째인 이날 백악관 주변은 경찰은 물론 군용차량들이 주요 길목을 막고 있었다. 백악관 경계로부터 세 블록(반경 약 400~500m)에 일반차량 통행을 차단했다. 상공에는 하루 종일 헬기가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빙빙 돌았다. 백악관 둘레에는 전날까지 없던 약 240㎝ 높이의 검은색 철망이 설치됐다. 철망 너머 백악관까지의 완충지대라 할 수 있는 라파예트공원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헬멧과 방패를 든 채 시위대를 마주 보고 늘어섰다. 미 국방부는 워싱턴에 투입할 수 있도록 1600명의 헌병과 보병대대 등 현역 육군 병력을 인근에 배치했다고 밝혔다. 2020년 미국의 수도라고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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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현지시각) 시민들이 백악관을 바라보며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워싱턴/ 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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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불어난 시위 인파는 서로에게 ‘평화시위’를 독려했다. 통행금지 시각인 저녁 7시가 넘어서면서 감정이 격해진 일부 시민들이 철망을 넘어뜨릴 듯 흔들자 다른 사람들이 “저들에게 빌미를 주지 말자”며 제지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든 채 “쏘지 마라”를 외치거나, 손뼉을 맞춰 치거나 무릎을 꿇는 동작 등을 하며 쉼 없이 구호를 외쳤다. 경찰도 최루탄 발사 등을 자제해, 전날과 같은 큰 실랑이는 없었다.

이 시위가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어렵다. 워싱턴과 접한 버지니아주의 경우, 이번 주말까지 주거지역 곳곳에서도 시위 일정이 잡히는 등 오히려 저변으로 더 번지는 모습이다. 마주 선 시위대와 군·경찰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시위대의 함성은 트럼프를 향하고 있지만, 이미 보편적 민심보다 보수 지지층만 바라보기로 작심한 그에게서 해결책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트럼프는 전날 교회 앞 사진촬영을 위해 통행금지가 시작되기도 전에 평화로운 시위대를 최루탄으로 밀어내도록 하는 등 민주적 가치를 내팽개쳤다. 그는 일부의 폭력만 부각하며 통합이 아닌 분열의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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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현지시각) 백악관 앞에서 열린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에서 한 시민이 신호등 기둥에 올라가 “그의 이름을 말하라!”고 외치자 시민들이 “조지 플로이드!”를 제창하고 있다. 이 신호등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성경을 들고 사진촬영을 한 세인트 존 교회 바로 앞이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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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남성 크로퍼드(50)는 시위를 끝내려면 “대통령의 (인종차별 해결에 대한) 보장이 있어야 할 거 같다”면서도 “자신 없다”고 말했다. 성공회 워싱턴교구 목사인 레들리 로린은 “길을 찾기 위한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누군가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하지만 아주 큰 작업”이라고 말했다. 로린은 트럼프가 국민에게 고개 숙이는 일도 없을 거라고 했다. 미국은 길을 잃었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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