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30 (토)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n번방의 십대 남성들은 누구입니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한겨레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이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역 9번 출구와 10번 출구 사이에서 성폭력 규탄 이어말하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 11월이었습니다. 제보를 받고 한 텔레그램 방에 입장했습니다. 딛고 있던 세계가 훅 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존엄이 무참히 훼손됐습니다. 매일 성착취 영상을 갈구하고,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하면 열광하던 남자들이 수천, 수만 명 있었습니다. 다수는 십대로 추정됐습니다.

그 세계를 6개월째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지는 성착취는 이전에 ‘음란물’로 불리던 동영상들의 유통과는 다릅니다. 텔레그램 성착취 영상은 피해자의 구체적 신상이 특정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신상이 특정된 피해자가 성적으로 파괴되는 과정이 낱낱이 생중계됩니다. 그 방에 모여 있는 이들은 그렇게 가상세계에서 ‘인간사냥’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신상을 아는 여자를 구체적으로 지배하는 감각입니다. 무엇보다 그 안에선 그 집단 범죄 행위를 아무도 말리지 않던 풍경이 매일 반복된 것에 가장 소름이 끼쳤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해 11월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 기사에 이어 최근 ‘n번방과 불법도박, 범죄의 공생’ 기획 보도를 끝낸 사회부 기자 김완입니다. <한겨레>는 지난해부터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고발하고, 그 세계에서 ‘엔분의 일’(1/n)의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이 어디로 뻗어가는지를 취재해왔습니다. 그사이 ‘박사’ 조주빈(24), 엔(n)번방 개설자 ‘갓갓’ 문형욱(25)이 검거됐습니다. 500만명 이상의 청원으로 ‘n번방 방지법’들이 통과되었고, 디지털 성범죄 단죄 여론이 이례적일 만큼 커졌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사라지지 않고 오늘도 범죄는 계속됩니다. 여전히 카카오톡 ‘오픈 카톡방’에서 ‘야동엽’과 ‘평경장’이 성착취 영상을 유포합니다. 트위터에는 더 공공연히 성착취 영상을 유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성착취 영상이 불법도박으로 이어지고, 여러 다른 범죄의 시발점이 됩니다. 성착취 영상들은 십대를 옭아매는 거대한 충동의 ‘관문’입니다.

충동, 끝내 충족되지 못할 만족입니다. 전문가들은 뇌 성장이 끝나지 않은 십대가 성인에 비해 충동에 더 취약하다고 말합니다. 충동의 회로에 들어서면 이유나 목적을 상실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십대들은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삽니다. 한번 삐끗하면 시스템에서 탈락할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십대에 광범위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정서는 그래서 그 자체로 충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배제와 경쟁이 심화됐지만 사회는 안전망이나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몇 가지 문제가 겹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청소년상담사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지금의 십대 남성들은 아버지가 가부장으로 누렸던 것을 거의 대부분 못 누린다는 것을 압니다. 반면, 여성들은 태어날 때부터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인류입니다. 현실의 십대 남성들은 늘 여성들에게 치이고, 못 미치고, 정당하게 경쟁하다 패배한다고 생각하는데 사회는 계속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말만 한다고 느낍니다. 여성차별 현실은 엄연하지만 그들은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그릇된 지배와 일탈의 충동은 이 괴리 어딘가에서 발현합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성착취방 가담자의 도착적인 상황 인식이 그랬습니다. 그는 “여자들은 허벅지 사진, 가슴 사진만 올려도 누가 돈 주고 사가니까 쉽게 돈을 버는데 남자들은 그게 안 되니까 어렵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착취를 기회로 착각하는 잘못된 인식이지요.

지금 십대들은 ‘모모 세대’(모어 모바일·More Mobile)입니다. 태어날 때 이미 모바일 기기가 있던 첫 세대입니다. 돌 지난 아이가 티브이 화면을 터치하는 것을 보며 깔깔대는 것은 이제 우리의 익숙한 일상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쥐고 산 경험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스마트폰 안에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에선 내가 감춰집니다. 나를 드러내지 않고 어떤 유희도 누릴 수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자아를 아무렇게나 전시해도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텔레그램에서 성착취 영상을 관람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불법도박에 빠져드는 십대들은 그래서 그냥 온 것이 아닙니다. 방치의 결과입니다. 새롭게 보이지만 그들의 범죄는 성 매매, 매수가 일상적이었던 사회를 학습한 결과이자 여성을 상품화해온 역사의 산물입니다. 십대는 정말 괴물입니까. 갑자기 이상한 이들이 탄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어제의 우리입니다.

김완 사회부 기자 funnybone@hani.co.kr

한겨레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하세요!
▶네이버 뉴스판 한겨레21 구독▶2005년 이전 <한겨레> 기사 보기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