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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불리하면 ‘침묵’ 트집잡을 땐 “군사합의 위반”… 北의 내로남불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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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입’이 거칠어지고 있다. 지난 3월 개인 명의 담화에서 청와대를 향해 “저능하다”고 비난한 김 제1부부장은 이번에는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삐라) 살포를 트집 잡았다.

세계일보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김 제1부부장이 문제 삼은 대북 전단은 지난달 31일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경기 김포에서 살포한 것이다. 이 단체는 대북전단 50만장과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000장, 메모리카드 1000개를 대형 풍선에 매달아 북으로 보냈다.

김 제1부부장은 남측을 향해 “못된 짓을 하는 놈보다 못 본 척하거나 부추기는 놈이 더 밉다”며 “표현의 자유요 하는 미명하에 방치한다면 남조선(남한) 당국은 머지않아 최악의 국면까지 내다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금강산 관광 폐지, 개성공업지구 완전 철거,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 9.19 남북 군사합의 파기를 거론했다.

북한은 5일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에서 대북전단 살포와 남한 정부의 대응을 비난하며 남북관계 단절도 불사하겠다고 경고했다. 통일전선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완전한 폐쇄를 언급하면서 김 제1부부장이 대남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며 전단 관련 실무조치를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남한 흔들기’가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불리하면 침묵하고 트집잡을 땐 “군사합의 위반”

북한은 최근까지도 관영 매체를 동원해 우리 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군사합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비난을 해왔다.

북한 인민무력성 대변인은 지난달 8일 우리 해군과 공군이 서해 군산 앞바다에서 실시한 합동훈련과 관련, “지상과 해상, 공중에서 상대방에 대한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서해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 데 대해 온 민족 앞에 확약한 북남(남북)군사합의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행위”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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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 내 화살머리고지에 있는 감시초소(GP)에 태극기와 유엔기가 게양되어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대남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1월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북남 군사 합의에 대한 난폭한 파기 행위”라고 주장했다. 우리민족끼리TV는 지난해 12월 우리 군의 F35A 스텔스 전투기 도입을 “한사코 북남 군사합의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우겨대는 이들의 추태야말로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짓거리”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우리 군을 강하게 비난하는 북한은 자신들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옹호하거나 침묵했다. 지난달 3일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우리측 감시초소(GP)에 14.5㎜ 고사총 4발을 쐈다. 명백한 군사합의 위반이지만, 북한은 유엔군사령부와 우리 군의 협의 요청을 묵살했다.

북한은 지난 3월 21일 관영 매체를 통해 “남조선 청와대 것들과 군부 것들이 우리 군대의 정상적이고 자위적인 훈련에 평화정착 노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느니, 군사합의 정신에 배치된다느니 하는 넋두리를 늘어놓았다”며 “파렴치성에 경악과 격분을 금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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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초대형방사포가 가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반면 지난해 11월 23일 서해 창린도에서 김 위원장이 해안포 사격을 지시하고 기념사진을 찍은 것에 대해서는 “창린도 방어대를 찾으신 경애하는 원수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한식솔마냥 다정히 둘러앉아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볼수록 가슴 뜨겁다”고 추켜세웠다.

북한의 태도를 종합해보면, 우리 군의 훈련이나 F35A 도입 같은 전력증강은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으로 상호 적대행위를 금지한 남북 군사합의 위반이다. 반면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방사포 발사는 자위적 차원의 훈련이며, GP 총격은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남한의 행위를 비판하는 북한의 ‘내로남불’ 시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지난달 8일 인민무력성 대변인 담화에서 “적은 역시 적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나쁜 행동-한미 연합훈련, 한국군 독자적 훈련, 전력증강 등-을 중단해야 남북 관계도 개선될 수 있다는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면, 남한은 안보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실행 불가능한 요구를 내걸며 남한을 비난하는 북한의 의도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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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이 지난달 31일 김포시 월곶리 성동리에서 '새 전략핵무기 쏘겠다는 김정은'이라는 제목의 대북 전단 50만장, 소책자 50권, 1달러 지폐 2000장, 메모리카드(SD카드) 1000개를 대형풍선 20개에 매달아 북한으로 날려 보냈다고 1일 밝혔다. 사진은 대북전단 살포하는 탈북민단체. 연합뉴스


◆불분명한 군사합의 조항도 문제

김 제1부부장의 담화에 대해 군사합의 주무부서인 국방부는 “군사합의는 지켜져야 한다”면서도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군 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의 이같은 태도는 대북 전단 살포가 군사합의에 저촉되는 것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군사합의 제1조에 따르면, 남북은 지상과 해상 및 공중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이 되는 일체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여기서 긴장과 충돌의 근원이 군대인지 민간인지는 명확히 거론되지 않았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도 긴장과 충돌의 근원에 포함될 수 있다. 2014년 민간단체가 대북 전단을 띄우자 북한이 고사총을 발사, 남북 간 총격전이 벌어진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제2조 3항은 군사분계선 상공에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규정했다. 회전익항공기는 10㎞, 고정익항공기는 20~40㎞, 기구는 25㎞, 무인기는 10~15㎞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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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2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들이 대북 전단을 날리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대북전단 풍선을 기구로 분류하면 남북 군사합의를 위반했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기구로 간주한다 해도 군대의 활동을 규정한 군사합의로 민간단체의 행동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론이 많다.

2018년 군사합의를 처음 만들었을 때, 우리 군은 북한군이 기구를 이용해 군사분계선 이남을 정찰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고자 비행금지 대상에 기구를 포함했다. 통일부가 법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북한이 언제든 군사합의를 흔들며 억지를 부릴 가능성이다. 우리측이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는 비군사적 사안”이라고 설명해도, 북한이 이를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원인으로 규정하고, 군사합의를 위반했다며 계속 문제를 삼을 수 있다.

군 당국은 물론 정부조차도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단기간 내 원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은 우리측을 오랜 기간 압박할 ‘만능열쇠’를 확보한 셈이다.

이렇게 되면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만들어진 군사합의가 북한의 대남 공세에 역이용되는 상황이 계속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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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군사합의에 따라 철수 대상에 포함된 GP에서 병사들이 철문을 잠그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북한이 군사분계선 일대의 병력 축소나 GP 철수 등 자신들에게 불리한 군사합의 추가 조치 이행은 회피하고, 대남 압박처럼 유리한 부분만 활용하는 ‘체리피커’(자신의 실속만 차리는 소비자) 전략을 구사하면 우리측으로서는 대응 방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

정부는 김 제1부부장 담화 직후 “접경 지역에서의 긴장 조성 행위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정부는 북한이 대북 전단을 비방하면 유감표시를 한 것과 달리 현 정부는 ‘북한 달래기’가 급선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우리 군의 훈련과 전력증강을 군사합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비난해온 상황에서 민간단체 대북 전단 살포까지 거론하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철폐 카드까지 꺼내든 것은 중대한 문제다. 북한의 기조가 단기간 내 바뀌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북한의 공세에 맞설 전략을 장기적인 시각에서 구사할 필요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사합의의 이행에 필요한 동력은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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