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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아무튼, 주말] 여름도 되기 전에 벼베기? ‘전국 최초’ 경쟁하는 여주·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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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판매 좌우, 홍보 신경전

#1. 지난달 26일, 경기도 여주시 우만동에 있는 한 농가(2500㎡)에서 전국 첫 벼 베기 행사가 열렸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2020년도 여주 쌀 전국 최초 첫 벼 베기'라고 플래카드가 걸렸고, 이항진 여주 시장과 지역 농협조합장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막 베어낸 벼를 안고,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포즈를 잡았다.

#2. 지난해 6월 18일에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의 한 비닐하우스 논에서 엄태준 이천 시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임금님표 이천 쌀 전국 첫 벼 베기 행사'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천시는 오는 15일쯤 첫 벼 베기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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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이천시가 개최한 전국 첫 벼베기 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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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여주시의 첫 벼베기 기념행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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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벼는 기온이 섭씨 약 20도일 때 모를 심은 뒤 150일 정도가 지나면 수확할 수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노지(露地) 농사는 대개 5월 중·하순에 모를 심고, 9월~10월에 벼를 벤다.

그런데 한여름에 벼 베기가 가능한 것은 비닐하우스에서 벼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부 농가는 비닐하우스 온도를 약 20도로 맞춰놓고, 벼농사를 한다. 겨울이 끝나지 않은 2월쯤 모를 심어 한여름이 되기도 전에 수확하는 것이다.

1990년대부터는 '첫 벼 베기'를 놓고 경쟁이 불붙었다. 경기도 남부에 있는 여주시와 이천시가 라이벌이었다. '첫 벼 베기'라는 타이틀을 놓고 이른바 '쌀 전쟁'을 펼친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홍보 효과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첫 벼 베기를 하면 언론사 카메라가 따라와서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그해 쌀 판매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런 경쟁 때문에 기후로는 당연히 남부에서 먼저 해야 하는 '첫 벼 베기' 타이틀을 놓고 늘 두 도시가 경쟁했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갖가지 신경전도 펼쳐졌다. 농업 관계자 등에 따르면 과거 A시는 첫 벼 베기 하는 날짜를 정해놓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짜가 B시 관계자에게 하루 전에 샜다. 이를 인지한 B시는 그날 곧바로 첫 벼 베기 행사를 진행하고, 보도 자료를 뿌렸다고 한다. 이 밖에도 두 도시 농업 관계자들은 수시로 상대방 시에 있는 논에 가서 벼가 익어가는 상황을 살피기도 했다. 두 지자체는 벼 베기 외에 쌀 브랜드를 놓고도 경쟁했다. 이천시가 1995년 먼저 '임금님표'라는 브랜드를 도입하자, 여주군도 이듬해 '대왕님표'로 맞섰다.

이런 경쟁은 1995년 기초자치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게 되면서 더 치열해졌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한 도시가 먼저 벼 베기를 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한다면 상대방 기분이 좋을 리 없다"며 "그래서 담당 공무원은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경쟁이 약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품종이 같은 벼를 생산하던 두 지자체가 서로 다른 품종으로 바꾸면서다. 여주시와 이천시는 원래 일본 품종 '추청벼'를 생산했는데, 2018년 여주시는 '진상벼'라는 품종을 들여와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천시는 '해들'이라는 품종으로 바꿨다. 농촌진흥청 식량산업팀 김정화 과장은 "그동안 두 도시가 외형적 홍보에 힘을 쏟았다면, 최근 들어 더 밥맛 좋은 쌀을 내놓기 위해 경쟁하는 추세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여주시와 이천시 관계자도 "품종을 개량해 밥맛이 좋은 데다가 코로나19로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쌀이 너무 잘 팔린다. 경쟁이라고 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천시는 8182㏊ 규모의 논에 벼를 심어 쌀 4만2183t을, 여주시는 7000여㏊ 부지에서 3만3383t을 생산했다.

[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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