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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나는 왜 강남 한복판에서 히치하이킹을 해야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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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삼성서울병원 오수영 교수

2017년 12월 말, 연말 저녁이라 북적이는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서 한 여자가 도로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히치하이킹. 성균관대 의대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의 오수영(50) 교수는 막 동료의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그날 오후 출산한 산모의 복강 내 동맥 출혈이 의심된다는 내용이었다. 병원 송년회는 당연히 물 건너간 상황. 당장 수술을 해야 산모가 살 수 있는데, 가까스로 발견한 택시는 지방서 왔다며 서울 운행이 불가하다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인데 지금 가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히치하이킹에도 서는 차가 없었다. 한 시간 같은 십 분이 흐른 뒤, 10m 앞에 택시가 섰다. 전력 질주 후 탑승. 예상 소요 시간은 38분. 산모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차에 탄 오 교수가 병원 동료와 통화하는 걸 들은 기사가 오 교수에게 손잡이를 잡으라고 했다. 20분 만의 병원 도착. 세 시간 수술 끝에 오 교수는 속으로 말했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조선일보

오수영 서울삼성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주인공 채송화(전미도)의 롤모델이다. 오 교수는 “오히려 제가 채송화를 롤모델로 삼아야 할 것 같아요. 채송화는 환자들에게 정말 친절하고 상냥하던데요. 저는 그러지 못할 때도 있어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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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출산율이 한 명도 안 되는 저출산 시대. 오 교수는 고위험 임산부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분투한다. 3차 병원(중증 질환에 대해 난도가 높은 의료 행위를 전문적으로 행하는 종합병원)까지 와야 할 정도의 고위험 임산부다.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15년째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에서 근무 중. 그는 최근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태어나줘서 고마워'를 냈다.

희망을 주는 의사에서 절망을 주는 의사로

―급박한 순간이 많은가요.

"출산은 예정일이 있다고 해서 날짜와 시간이 그대로 지켜지는 게 아닙니다. 퇴근 이후나 주말에 병원에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어느 일요일에는 세 번 출근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 달에 평균 여섯 번 정도 그렇게 병원에 가고, 주니어 때는 그런 횟수가 더 많았어요."

―총알택시 운전기사에게 고마워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과속한 적 있나요.

"새벽에 응급 상황이 벌어지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시속 100㎞로 달리면 집에서 병원까지 10분 걸려요. 속도 위반 딱지는 수도 없이 많이 떼였고, 신호등이 노란불일 땐 그냥 직진이죠. 딱 한 번 빨간불일 때 달렸는데, 경찰한테 걸렸어요. 사정 설명하고 운전면허증 조회하는 데 걸린 시간이 5분. 그 시간이 아까워서 그 이후로 신호를 잘 지킵니다."

―고위험 임신이 많은가요.

"유산 확률은 10~15%, 조산 확률은 8%이고, 쌍둥이 임신도 고위험 임신에 속해요. 이런 합병증이 여럿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요. 아무 문제 없이 임신과 출산을 할 확률은 60% 정도? 세포와 세포가 만나서 개체가 되는 과정인데 거기서 얼마나 다양한 일이 벌어지겠어요. 임신은 생리적 과정인 동시에 병적인 과정이란 건 의학적으로 분명한 사실인데, 이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임신이란 좋은 소식을 갖고 병원을 찾은 임신부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게….

"절망을 주는 의사가 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 달라요. 아기에게 문제가 생겨서 건강하게 태어날 확률이 10%라고 했을 때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사람이 있어요."

―두 사람 간에 어떤 차이를 보이나요?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은 질문이 없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질문이 많습니다. 일단 아이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면 아이가 살 확률이 몇 퍼센트냐고 계속 묻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확률이 떨어졌다고 마음을 바꾸지 않거든요. 끝까지 끌고 가는 부부는 둘이서만 병원에 옵니다. 어차피 산모와 남편이 결정할 일이라는 걸 아는 거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가족이 우르르 몰려오는 경우가 많죠. 친정이나 시댁 얘기에 휘둘리거든요. 또 남편 태도를 봐도 알 수 있어요. 남편이 아내를 지지하거나 제 설명을 귀담아듣는 경우엔 끝까지 끌고 가요. 진료실에 들어와서 다리부터 꼬고 앉는 남편은 결국 정상이 아닌 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더군요."

유산은 병이 아니다… 자책하지 말자

오 교수는 지난 5월 말 종영한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의 주인공 중 하나인 채송화의 롤모델이다. 작가들이 오 교수를 비롯해 그의 주변 사람을 취재해 채송화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드라마에서 채송화는 "단점 없음, 위인전이라도 쓰고 싶음"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학교 다닐 때부터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병원에서도 실수 하나 없이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제작진은 여성인 채송화가 산부인과 의사를 하는 게 너무 전형적으로 비칠까 봐 나중에 신경외과 의사로 역할을 바꿨다.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나요.

"산부인과 의사인 석형이 '유산은 병이 아니다'라고 하는 대사요. 제 환자 중에서도 이 장면에서 위로를 받은 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유산은 병이 아니고 임신 과정 중 하나일 뿐입니다. 확률적으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요. 그런데도 '내가 신경을 못 써서 그런가' '내가 직장을 다녀서 그런가' 하고 죄책감을 갖습니다."

―왜 산부인과 의사가 됐나요.

"본과 3학년 때 10시간이 넘는 산통 뒤 가까스로 태어난 아기가 세상을 향해 첫 울음을 터뜨리는 걸 봤거든요. 결정적인 건 그 뒤 제왕절개 수술에 보조의로 참여했을 때입니다. 산모의 배 위로 새 생명이 튀어나오고 순식간에 대량 출혈이 이어지는데, 그 다이내믹한 과정을 보면서 피가 끓는 느낌이 들었어요. 역동성과 기쁨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 산부인과는 평생 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저출산율 시대, 한국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 한 전공의가 저에게 그 질문을 했어요. 고위험 산모나 아기는 예측 불가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가 그런 경우 보호자들이 거칠게 따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분만은 저평가된 의료 행위고, 보상도 별로 없어요. 그 전공의도 이런 현실을 깨닫고 저한테 물은 거죠. 어려운 과정을 겪고 아기를 태어나게 한 의료 행위의 가치는 부모와 아기가 알 것이고, 그 가치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고 대답했어요."

조선일보

수술실에서 수술 중인 오수영(맨 왼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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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탄생 신화

성균관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 중 오 교수가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다른 전공의 의대 교수인 남편과 대학생, 고등학생인 두 딸을 뒀다. 첫째 딸이 책 서문을 썼다.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1년 6월에 둘째 아이를 낳은 산모가 있었어요. 아이에겐 선천적 기형이랄 수 있는 구순열(일명 언청이)이 있었죠. 그 후 넷째 아이를 가졌을 때 저를 찾아온 그 산모가 '선생님, 둘째 안 낳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지금 둘째가 제일 예뻐요'라고 했어요. 이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날 기록을 해놨어요. 이런 기록이 하나둘 쌓여서 페이스북에 공유했더니 주변에서 책으로 내라고 떠밀더군요."

―왜 그 말에 감동을 받았나요.

"임신 중 조산, 임신중독증과 같은 합병증이 생기거나 아이가 기형, 질환을 갖고 태어나면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출산에 성공과 실패가 있을까요? 만삭이 아닐 때 태어나면 실패인가요? 만삭에 태어났는데 나중에 다른 발달 장애나 기형이 발견되면 실패인가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실패는 없습니다."

―고위험 임신 사례를 보고 겁을 먹을 수도 있지 않은가요.

"아는 게 힘입니다. 사람들이 임신 합병증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크게 좌절하거나 자책하는 경우가 많아요. 임신 중 발생할 수 있는 일을 알고 경험하는 것과 모르는 채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며칠 전 구순열이 있는 태아를 임신한 사람이 외래에 왔는데, 이 책을 읽고 안정을 찾았다면서 사인을 해달라고 하던데요."

―책 제목도 그렇고, 책에도 유독 '고맙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저를 신뢰하고 출산까지 묵묵히 따라준 산모를 보면 안아주고 싶고, 어떨 땐 업어주고 싶어요. 아이들도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엄마를 힘들게 하고 세상에 나온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이 책을 통해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게 다 아이들의 탄생 신화 같은 거잖아요. 얘들아, 너희는 알 깨고 나온 박혁거세보다 더 힘들게 태어났단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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