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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만물상] K스포츠의 검은 그림자,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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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에서 활약한 이영표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진출해서 힘겨웠던 고비를 이겨낸 비결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는 “고비 때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시궁창에서 짓밟혀보기도 했는데 이까짓 거야 양반이지’ 하면서 이겨냈다”고 했다. 그 시절 대표팀에는 어린 시절부터 안 맞아본 선수가 한 명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강압적인 훈련과 체벌을 견뎌낸 선수들이 한국 스포츠를 이끌었다. 프로야구의 신바람 응원, 세계 정상급 실력을 갖춘 여자골프 등 한국 스포츠의 외양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쪽 발은 시궁창에 빠져있다.

▶한국 영화 '4등'은 체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국 스포츠의 심리를 묘사한다. 번번이 4등에 그치는 초등학생 수영 선수에게 코치가 가차 없이 매를 든다. 아들의 멍 자국에 화가 난 아버지가 '선수를 코치가 때리느냐'고 화를 낸다. 오히려 아들이 "제가 잘 못해서 맞은 것"이라고 한다. 코치도 '다 너를 위해서 때리는 것'이라고 한다. '맞아야 메달 딴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곳에서 폭력이 일상화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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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일본 체조계도 선수 폭행 사건으로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다. 열다섯 국가대표 미야카와 사에를 폭행하는 동영상이 공개된 코치 하야미 유토는 "나도 어린 시절에 맞으며 운동했기 때문에 선수를 때려서라도 잘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맞고 자란 선수가 코치가 돼 선수를 때리는 폭력의 대물림은 한국 스포츠에 만연해 있다. 쇼트트랙 심석희를 폭행해 실형을 받은 조재범 코치가 대표적이다.

▶폭행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떠난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경기) 최숙현 기사에 "살아서 복수를 하지 그랬느냐"는 안타까운 댓글이 쏟아진다. 선수들은 학교 진학과 취업에 결정권을 지닌 지도자 밑에서 '절대적인 갑을 관계'로 살아간다. 평생 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대한체육회와 해당 협회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지인들은 오열했다. 이들에게 스포츠계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곳이다.

▶의사도 아니고 자격증도 없는 인사가 ‘팀닥터’라고 불리며 전지훈련에 동행해 선수들 체벌까지 했다. 대한스포츠의학회는 “비자격자를 팀닥터로 불러 과도한 권위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성명까지 냈다. 스포츠 인권을 담당하는 주무 부서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 관계자들은 1년이 멀다하고 바뀐다. 전문성이 없는 곳에서 ‘폭력’의 독버섯이 자란다.

[민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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