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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플래시백 한국영화 100년] 영화 마케팅 귀재, 충무로 '왕의 남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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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시대극의 대가 이준익 감독

편집자주

한국영화가 지난해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가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서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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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영화 마케팅 전문가, 수입업자, 제작자를 거쳐 감독으로 대성한, 보기 드문 영화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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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경력은 디자인 업계에서 출발했다. ‘아름다운 시절’(1998)의 이광모 감독과 동기였던 경동고 2학년 시절, 담임선생으로부터 “넌 그림을 잘 그리니까 미대가면 되겠다”는 소리를 들은 그는 입시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학생들이 쓰고 남은 종이와 재료로 데생을 그리며 공부하다 세종대 미대 회화과에 79학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군에 입대했고 제대 직후 자퇴로 짧은 대학 생활을 끝냈다. 어려웠던 집안 사정이 겹치면서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든 그는 외판원, 세종로 정부 종합청사의 경비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종국에는 순수회화에 대한 꿈을 꺾고 화실 선배를 찾아가 디자인 관련 일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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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데뷔작 '키드 캅'(1993). 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며 이 감독은 이후 10년 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 씨네월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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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대로 일한 청년기


여성잡지 주부생활과 여성자신, 두 잡지에 그린 일러스트로 평판이 높아지면서 이 감독은 디자인 파트 아르바이트를 도맡게 된다. 영화계와의 접점은 이즈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함께 일하던 주부생활의 문화부 편집기자 막내가 정성일 영화평론가였고, 여성자신의 편집장은 시인이자 나중에 ‘내 친구 제제’(1989)를 연출하는 이세룡 감독이었다.

‘깜보’(1986)의 이황림 감독이 합동영화사 산하의 서울극장 기획실장 일을 그만두자 그와 친분이 있던 이세룡 감독이 대타로 들어갔는데, 같이 일할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이세룡 감독의 말에 이준익 감독은 자신이 하겠다며 면접을 보러 갔다. 서울극장에서 일하게 된 이준익 감독은 간판과 포스터 디자인, 광고 카피와 로고를 도맡으며 도안사(圖案士)로 충무로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처음에 ‘변강쇠’(1986). 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 임권택 감독 ‘티켓’, ‘마지막 황제’(1987), ‘로보캅’, ‘백 투 더 퓨쳐’(1985), ‘양들의 침묵’(1991),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 너무 많아. 한 1,000편 되는데 어떻게 다 얘기하냐.“(영화주간지 씨네 21 2006년 9월 29일자)

잡지사 디자인 일을 하면서 얻은 감각을 영화 홍보물에도 활용하면서 이 감독은 영화 마케팅업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서울극장에 몸담고 있었지만, 아르바이트 삼아 건드린 외주 일의 비중은 갈수록 늘어나 대한극장, 명보극장의 영화 광고까지도 전부 그의 손을 거칠 정도였다.

곽정환 합동영화사 회장에게 여섯 번 사표를 낸 끝에 프리랜서가 된 이 감독은 뒷날 각각 영화사 아침과 타이거 픽쳐스의 대표로 독립하는 정승혜, 조철현과 손잡고 1987년 영화 광고 대행사 씨네시티를 창립했다. 이들은 1,500편 넘게 작업하며 “그때 당시 다섯 개 직배사 광고시장을 다 ‘도리’(싹쓸이)를 해버”리다시피 한 영화 광고업의 독보적인 존재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경력의 정점을 찍은 그는 조금씩 다른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피카디리 극장의 신철, 명보극장의 선전부장을 했던 배우 김일우, 김홍준 감독, 정성일 평론가 등과 어울리곤 했던 이 감독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영화로 향하게 되었다. 할리우드 직배 영화와 홍콩 영화가 극장가를 지배하다시피 하던 당시 ‘나홀로 집에’(1990)처럼 아이들이 볼 수 있는 한국 영화가 없는 현실을 개탄한 그는 한국 영화도 충분히 재미있으며 외화에 지지 않고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음을 입증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1992년 씨네월드를 창립한 그는 “‘구니스’(1985) 같은 다섯 아이의 어드벤처, ‘다이 하드’(1988)의 한정된 공간, ‘나홀로 집에’처럼 거기에 도둑이 들어온다는 설정, 세 가지를 섞어” 쓴 시나리오를 들고 곽정환 회장을 찾아갔다. 데뷔작 ‘키드캅’(199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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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은 10년만에 선보인 연출작 '황산벌'(2003)로 충무로에서 주목해야 할 감독으로 단숨에 떠오른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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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 발판된 영화 '황산벌'


강우석 감독에게 제안이 갔던 ‘키드캅’의 시나리오는 ‘투캅스’(1993)와 일정이 겹치는 관계로 반려되었고, 합동영화사 대신 삼성영상사업단이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면서 이 감독에게 메가폰이 돌아갔다. 영화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현장 경험도 없었지만, ‘그대 안의 블루’(1992)를 한창 촬영 중이던 이현승 감독의 현장을 견학하는가 하면, ‘잃어버린 너’(1991)의 원정수 감독을 프로듀서로 영입해 영화에 관련한 실무를 속성으로 익혀나갔다.

‘키드캅’의 작업 진도는 첫 촬영날에만 80컷을 찍어낼 정도로 진척이 빨랐다. 일정과 예산을 낭비 없이 운용하는 이준익식 영화 만들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시사회에서의 좋은 반응에도 불구하고 ‘키드캅’은 2만명을 겨우 넘기는 수준으로 참패하고 만다. 어린이 영화는 날림으로 만든 유치한 영화라는 편견의 벽은 높았고, ‘함량미달인 선무당이 낳은 사생아’라 데뷔작을 자평한 이 감독은 ‘황산벌’(2003)로 복귀하기까지 10년간 연출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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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 '왕의 남자'는 1,200만 관객을 모으며 기념비적 사극 영화로 남게 된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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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1,000만 사극 영화


‘키드캅’을 첫 연출작이자 첫 은퇴작으로 일단 마무리한 이 감독은 한동안 외화수입과 제작에 전념하게 된다. ‘택시’(1998), ‘벨벳 골드마인’(1999), ‘헤드윅’(2000),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메멘토’(2000) 등이 그의 안목을 통과해 씨네월드 이름으로 수입된 영화들이었다. 컬트의 제왕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성스러운 피’(1989) 같은 화제작도 들여왔는데 안타깝게도 심의로 여러 장면이 삭제된 탓에 영화광 관객의 외면을 받는 불운을 겪는다.

제작자로서 이 감독은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의 실패로 충무로의 기피 대상이 되어있던 박찬욱 감독, 박 감독의 동료로 ‘박리다매’라는 각본팀을 꾸리고 있던 이무영 감독과 함께 상하이를 오가며 ‘아나키스트’(2000)를 개발하는가 하면, ‘기막힌 사내들’(1998)로 막 감독 데뷔한 장진을 기용해 ‘간첩 리철진’(1999)을 만들어 성공시켰다. 단편 ‘지리멸렬’(1994)을 내놓았던 봉준호 감독도 이 시기 무산되기는 했지만 씨네월드에서 자기 신세를 비관하는 노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하기도 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하느라 박 감독이 떠난 연출을 유영식 감독에게 맡긴 ‘아나키스트’가 실패하면서 씨네월드의 경영은 큰 충격을 받고 휘청거리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뒤이어 제작한 ‘공포택시’(2000)마저 망하면서 부담은 가중되었고 ‘나인 야드’(2000), ‘러시아워 2’(2001) 같은 외화 수입에서 얻은 수익으로 근근이 버텨야 했다. 그러나 코미디 영화 ‘달마야 놀자’(2001)가 전국관객 380만명이라는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일시적으로 숨통을 튼 이 감독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까지 협업하게 되는 파트너 최석환 작가와 함께 첫 사극 ‘황산벌’을 준비하게 된다.

당시로선 드문 코미디 사극에 역사적 인물들이 지역별 사투리로 대사를 친다는 독특한 설정 탓이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며 투자를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잠재성을 눈여겨봤던 강우석 감독에 의해 시네마서비스의 전액 투자를 받으면서 청신호가 들어온 ‘황산벌’은 순제작비 38억원이라는 중저예산에 277만 관객이 드는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둔다.

‘달마야 놀자’에 이은 ‘황산벌’의 성공 덕분에 10억원 넘게 불어있던 오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산군이 재위하던 조선 중기 광대들의 이야기를 그린 희곡 ‘이’(爾)를 원작으로 한 ‘왕의 남자’(2005)가 1,230만 관객에 달하는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하면서 이 감독은 마침내 흥행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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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은 저예산영화임에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준익 감독을 시대극의 대가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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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 새 틀을 정립하다


‘왕의 남자’의 대성공으로 충무로의 실력자가 된 이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자유와 재량을 얻었다. ‘라디오 스타’(2006)와 ‘즐거운 인생’(2007), 베트남전 배경의 ‘님은 먼 곳에’(2008)로 이어지는 ‘음악 3부작’, 조두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원’(2013)이나 세대 간 갈등과 소통을 이야기한 ‘변산’(2019) 같은 소시민적 드라마를 만드는 한편으론 역사를 다룬 작품들을 줄기차게 발표했다.

두 번째로 은퇴를 선언했던 ‘평양성’(2011)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 간의 비극을 그린 ‘사도’(2015),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의 일대기를 다룬 ‘동주’(2016),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열과 동지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그린 ‘박열’(2017)을 통해, 이 감독은 단연 한국영화 시대극의 일인자로 발돋움한다.

그의 영화들은 ‘영원한 제국’(1995)이나 ‘이재수의 난’(1999) 외에는 명맥이 끊겨있었던 사극을 다시금 한국 영화의 주류 장르로 끌어올렸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념적 프레임을 벗어나 민중의 시선에서 역사를 돌아보는 수정주의 사극의 단초를 열었다.

조재휘 영화평론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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