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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아침을 열며] 우리는 어떻게 현실 걱정을 멈추고 재테크 젬병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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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브렉시트 당시 정치인 마이클 고브의 인터뷰 장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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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에 관해서는 경제학자보다 그 배우자의 조언을 구하라"는 말이 있다. 부부는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가 다반사(?)인 만큼, 필시 그 말인즉슨 돈을 벌려면 경제학자의 조언과 정반대로 재테크를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위대한 경제학자 가운데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된 경우는 리카도나 케인스를 빼고 나면 매우 드물다. 필자를 포함하여 주변을 돌아보건대, 이는 단순히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엔 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이 말처럼 경제학자들이 대체로 재테크에 ‘젬병’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유 중 하나로 빚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고루한 인식을 꼽고 싶다. 종잣돈이 부족한 월급쟁이가 번듯한 집을 마련하거나 투자로 돈을 벌려면 빚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요즘 같은 초저금리 시대에 빚 없이 재테크를 하는 것은 마치 삽을 두고 숟가락으로 땅을 파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경제학자들에게 빚을 지는 것은 어딘가 찝찝한, 일종의 필요악 같은 행위이다. 빚을 내 소득 이상을 쓴다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마이너스’ 저축을 하는 셈인데, 경제학자들이 지금껏 익히고 만들었던 대부분의 모형에서는-금리가 플러스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가계가 늘 ‘플러스’ 저축을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제로금리,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가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인 상황에서 경제학자들만 플러스 금리가 ‘디폴트’이자 저축이 미덕인 과거의 세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제학자의 동떨어진 현실 인식의 수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경제학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예측과 대응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비현실적인 현실 인식은 수많은 비판 또는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 노벨상 수상자인 로머는 주류 거시경제학이 현실과 괴리된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으로 퇴행했음을 개탄했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도 주류경제학자의 최근 행태를 용도 폐기된 천동설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던 ‘천동설 옹호론(Ptolemaic attempt)’에 비유하기도 했다. 학계 밖은 더 하다. 오죽하면 브렉시트(Brexit) 와중에, "이미 전문가들이 차고 넘친다"며 조소하던 한 정치인의 발언이 유권자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을까?

어쩌다 경제학은 이렇게 현실과 멀어진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일반 대중의 관심사에 경제학자들이 대체로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기한 빚에 대한 고루한 인식으로 인해 경제학자들은 전통적으로 가계부채, 그리고 부채 확대의 주요인인 부동산 시장의 변동에 무심한 편이었다. 그나마 가계부채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금융위기 이후 최근의 일이며, 부동산 시장은 여전히 관심사 밖에 있다. 특히나 내 집 마련이 필생의 과제이고 건물주가 조물주를 능가하는 나라에서, 부동산 시장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이러한 무관심은 의아하다 못해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무관심에도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 학계 전반에 걸쳐 부동산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한 상황에서 관련 논문을 써 봐야 유력한 저널에 게재하기 어렵다 보니, 논문실적이 절대적인 교수 임용심사에서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필자를 포함하여-합리적 경제주체와 순수경쟁시장 모형에 경도된 주류경제학자들에게 정부규제와 투자심리의 변화에 유난히 민감한 부동산 시장이 다루기 까다로운 탓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경제학자의 관심사와 그들이 제시하는 이론 및 정책이 현실과 괴리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재테크에 관해서는 젬병인 경제학자 대신 배우자의 말을 들으면 되지만, 경제학자들의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 조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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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우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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