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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ILO 핵심협약 비준·노조법 개정, 더이상 미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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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유럽연합, ILO 핵심협약 비준 위한 지속적 노력 촉구


지난 6월 30일 열린 한·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EU 정상들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조속한 비준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한국의 의무 이행을 재촉한 것이다.

한국은 ILO 핵심협약 8개 중 차별금지와 아동노동금지와 관련한 4개 핵심협약만 비준한 상태다.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보장 협약(제87호),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협약(제98호), 강제노동협약(제29호), 강제노동철폐협약(제105호)은 비준하지 않았다. ILO 회원국 중 85%가 7개 또는 8개 협약을 비준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가장 적은 4개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있다. 국제노동기준을 지키지 않는다며 수차례 ILO의 시정 권고를 받았는데, 최근에는 국제무역과 투자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경향신문

문재인 대통령이 6월 30일 청와대에서 유럽연합(EU)의 샤를 미셸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과 화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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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악안” 대 “핵심협약 취지 일정 정도 부합”

EU는 2018년 12월 FTA 협정상 분쟁 해결 절차의 첫 단계로 정부 간 협의 절차를 요청하고, 2019년 7월 4일 두 번째 단계로 전문가패널 소집을 통보했다. FTA 협정의 13장 ‘무역과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과 그 외 최신 협약 비준을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했는데, 이 의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EU의 압박은 한국 기업이 국제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노동기준을 두면서 부당한 비용 절감으로 이득을 누려 불공정하다는 유럽의회의 반발과 노동·환경·인권을 무역정책과 연계시킨 후 체결한 첫 FTA인 한국과의 FTA를 성공 사례로 부각하고 싶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인권·정치적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새로운 세대의 무역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한국과의 FTA에서 처음 무역정책을 노동환경과 연계한 후 우리와 같은 내용으로 일본 등 여러 나라와 FTA를 체결했다”며 “한국이 최초 모델이라는 점에서 EU가 이 문제를 그냥 넘길 가능성은 제로”라고 말했다.

정부는 핵심협약 비준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보고 핵심협약 비준과 국내법 개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지난 6월 23일에는 국무회의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등 노조 관련 3법을 심의 의결해 국회에 송부했다.

노조 3법 개정은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비해 국내법을 정비하는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 노사관계·국제통상법 전문가인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우리가 유럽연합 및 미국 등과 각각 체결한 FTA 위반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노조 3법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사 양측의 반발이 거세 국회 논의 과정에서 수정될 가능성도 있다. 노동계는 노조법 개정안을 ‘개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해고자 노조 가입을 허용하면서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직장 점거 금지, 단협 유효기간 연장 등을 포함해 단체교섭권 행사를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독소조항의 핵심은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조항”이라면서 “쟁의행위는 사업장 일부의 점유·점거를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노동조합법 개정안 제42조는 “쟁의행위는 폭력이나 파괴행위의 형태 또는 생산 및 그 밖의 주요업무에 관련되는 시설과 이에 준하는 시설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설에 대해서는 그 전부 또는 일부를 점거하는 형태로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는 종전에 없던 ‘그 전부 또는 일부’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이를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으로 본 것이다.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을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내용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유효기간이 길어지면 경기 변동에 따라 임금인상 등이 필요한 노동자 입장에서는 불리하다고 볼 수 있다. 오민규 위원은 “한국의 단체협약 유효기간은 2년이 아닌 노조가 없다”며 “사실상 2년이 상한선인데 3년으로 연장하는 순간 모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이 전부 3년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은 당사자인 노사 자율에 맡기는 게 바람직하다는 데는 노동계·학계의 의견이 일치한다. 하지만 점거금지와 관련한 문제 제기는 과도한 해석이라는 견해가 있다.

■근로자 범위 확대·설립신고제 손봐야

대법원은 점거 범위가 직장 또는 사업장 시설의 일부분이고 사용자 측의 출입이나 관리·지배를 배제하지 않는 부분적이고 병존적인 점거의 경우 쟁의행위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판결하는데 개정안은 이 내용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궁준 위원은 “일본이 우리와 유사한 입장이고, 독일의 판례와 다수설은 직장 점거 형태의 쟁의행위를 위법하게 보고 있다”며 “ILO 기본 입장은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평화적 파업이라면 일정한 조건 하에 직장 점거를 허용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이승욱 교수는 “정부 법안에 따르면 직장 점거가 전부 금지된다고는 해석할 수 없고, 기존과 마찬가지로 해석에 맡겨져 있다고 봐야 한다”며 “부분적이고 병존적인 직장 점거까지 금지하는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쟁점이 자영업자 등을 포함한 근로자 범위 확대, 설립신고제에 있다고 봤다. 이승욱 교수는 “국회 논의 과정에서 노사 견해를 반영할 필요는 있지만 경영계 주장은 워낙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반되는 내용이라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핵심은 우리나라 특수성과 국제노동기준의 보편성의 조화인데 그런 과정에서 정부안이 우리의 특수성에만 기울어진 느낌이 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대표적인 예로 노동조합의 임원 자격을 기업별 노동조합인 경우 ‘종업원인 조합원’으로만 한정한 것을 들었다. 국제노동기준에 따르면 이는 당사자인 노조가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것이다. 남궁준 위원은 “유럽연합이 문제 삼는 두 가지 쟁점사항의 하나는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조법상 몇몇 규정 혹은 그에 대한 법원 등의 해석이 ILO의 결사의 자유 원칙을 위반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에 해고자, 실직자, 중장비 화물운전자와 같은 자영업자를 포함하지 않은 것, 노조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일 경우 노조로 인정하지 않는 것, 노조 임원자격 제한, 설립신고제도가 그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승욱 교수는 그중에서도 유럽연합과의 분쟁해결절차에서 가장 방어하기 어려운 부분이 설립신고제라고 우려했다. 노조법 개정안에 관련 내용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설립신고제는 노조 설립에 행정관청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가 있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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