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허삼영의 삼성,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는 이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일보

허삼영의 삼성이 올 시즌 프로야구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 송정헌 스포츠조선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작년 9월 삼성 라이온즈의 새 사령탑으로 허삼영(48) 전력분석 팀장이 선임될 때만 해도 삼성 팬들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현역 기록이 단 2와3분의1이닝이 전부였던 허 감독은 23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해 삼성에서 훈련지원팀과 전력분석팀 등 프런트의 길을 쭉 걸어온 인물이었다.

허삼영 감독은 부임 당시 “나는 선수의 장점을 보는 무명 감독”이라고 했다. 오랜 시간 삼성에서 전력분석팀으로 일한 만큼 선수들의 장점을 파악하는 능력이 생겼고, 이를 적극적으로 살리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10개월 뒤 7월 4일 LG전. 삼성은 연장 12회 접전 끝에 LG를 7대6으로 누르고 파죽의 5연승을 달리며 5위까지 올라왔다. 삼성 팬들은 요즘 “야구 볼 맛이 절로 난다”고 말한다.

2011~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 2015년 준우승의 ‘왕조 시절’을 끝으로 삼성은 9·9·6·8위를 기록하며 어느새 하위권이 익숙한 팀이 됐다. 그러면서 야구를 끊은 삼성 팬들도 많았다. 올 시즌 역시 삼성은 대부분 전문가가 꼽는 하위권 후보였다.

봉중근 KBS스포츠 해설위원은 개막을 앞두고 KBS스포츠 유튜브 ‘옐카3’에서 출연해 삼성을 예상 꼴찌 팀으로 꼽으며 “초보 감독인 허삼영 감독이 개개인으로 선수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의문이 든다. 허 감독도 학연, 지연이 있을 것”이라며 “허 감독이 1년 내내 144경기를 이런 상황에서 잘 꾸려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물음표를 달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삼성에서 전력분석팀으로만 20년을 보낸 허 감독의 커리어를 간과한 발언 같다. 허 감독은 오랜 시간 삼성 선수들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대화를 나누면서 누구보다 속속들이 삼성 선수를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1991년부터 선수 생활을 한 것까지 감안하면 올해로 삼성에서 근속 30년이다.

허삼영 감독은 ‘초보 사령탑’ 답지 않은 팀 운영과 날카로운 전략, 선수들을 하나로 만드는 리더십으로 올 시즌 프로야구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긴 암흑기로 우울한 시간을 보냈던 삼성 팬들은 허삼영의 야구는 재미있다고 입을 모은다. 단순히 성적이 잘 나와서가 아니라 ‘계산이 서는 야구’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선일보

4일 LG전에서 밀어내기 끝내기 이후 기뻐하는 삼성 선수들. / 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올 시즌 적재적소에 작전을 걸어 높은 성공률을 보이는 허삼영 감독은 4일 LG전에서도 고비마다 과감하게 승부를 걸었다.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선 6회말 이성곤이 안타를 치고 나가자 곧바로 이성곤보다 발이 빠른 최영진을 대주자로 기용했다. 마침 김동엽의 2루타가 터졌고, 최영진이 재빨리 홈으로 파고들어 4-2를 만들었다.

이학주를 대타로 쓴 타이밍도 절묘했다. 허삼영 감독은 이날 1군 엔트리에 올라온 이학주를 아끼고, 또 아끼다가 6-6으로 맞선 연장 12회말 1사 1·2루에서 대타로 기용했다. 올 시즌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클러치 상황에 강한 이학주를 적절한 타이밍에 올린 것이다. 이학주는 다소 석연치 않은 스트라이크 판정으로 삼진을 당하긴 했지만, 대타 기용 타이밍만큼은 기가 막혔다는 평가다.

그리고 2사 만루. 허 감독은 박승규를 대타 김호재로 교체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전력분석팀장 출신답게 데이터 활용에 능해 ‘허파고(허삼영+알파고)’라 불리는 그는 김호재의 최근 2군 기록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김호재는 1군에 올라오기 직전 5경기에서 5개의 볼넷을 얻어냈다. 그 데이터대로 김호재는 이번에도 볼넷을 얻어내며 끝내기의 주인공이 됐다.

8회초 김윤수를 마운드에 올려 LG 3·4·5번 타자들을 잇달아 잡아낸 장면도 돋보였다. 이날 마무리 오승환이 2실점하며 처음으로 블론세이브를 기록한 것이 아쉬웠지만, 전체적으로 투수진 운용은 깔끔했다.

조선일보

4일 동점타를 치고 기뻐하는 구자욱. / 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허삼영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오늘의 수훈 선수는 모든 선수가 맡은바 100% 활약을 해주었기에 모든 선수가 수훈 선수라고 생각한다”며 “본인은 부족하지만 선수들이 부족하다는 말은 인정 못 한다”고 말했다. 어떤 선수든 장점이 있고, 그 장점을 살리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란 지론이 다시 한번 드러난 인터뷰였다.

허삼영 감독은 올 시즌 초보 사령탑 답지 않게 선수단 운용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치아이 에이지 2군 감독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면서 1~2군 선수단을 폭 넓게 아우르면서 다양한 선수들을 활용하고 있다.

올 시즌 삼성에선 부상을 당하거나 부진이 길어지면 퓨처스리그(2군)로 내려가고, 그 빈자리를 2군 유망주들이 채우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한 탓인지 선수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쉬게 하고, 부상을 당해 2군으로 내려간 선수는 급하다고 일찍 당겨쓰지 않는다. 대신 2군에서 뜨거운 선수는 즉각 올려 주전으로 뛰게 한다.

박계범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주전을 꿰찬 이성곤은 지난 26일과 27일 데뷔 첫 홈런과 두 번째 홈런을 잇달아 쳐내며 맹활약했다. 허삼영 감독이 이성곤에게 퓨처스리그에서 컨택트 타이밍에 대해 주문을 했고, 이를 잘 준비한 이성곤이 주어진 기회를 잘 잡아낸 것이다. 올 시즌 퓨처스리그에서 타율 0.341로 활약했던 송준석도 1군에 올라온 지난 3일 멀티 히트를 치며 2타점을 올리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박해민과 김헌곤, 김동엽 등도 퓨처스리그에서 재정비를 한 뒤 1군으로 돌아와 활약 중이다. 특히 김동엽은 허삼영 감독이 최근 타구 질이 좋아졌다며 믿음을 가지고 주전으로 기용한 결과 4일 LG전에서 5타수 4안타 1홈런 2타점으로 폭발했다.

투수 출신인 허삼영 감독은 올 시즌 멀리 내다보는 투수진 운용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일단 다른 팀에서 흔히 불거지는 혹사 논란이 없다.

지난달 27일엔 올 시즌 22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2.14를 기록하며 ‘필승조’로 활약한 최지광을 2군으로 내려 팬들을 놀라게 했다. 한창 순위싸움을 해야 할 시기에 주요 불펜 투수에게 휴식을 부여한 것이다. 대신 1군으로 올라온 장필준이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불펜도 선순환 구조를 보인다는 평가다. 삼성 팬들은 “감독님의 리그 운영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고 말한다.

허삼영의 삼성이 더욱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선수들이 먼저 즐겁게 야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올 시즌 10개 구단 더그아웃 중 가장 시끄러운 팀이 삼성이다. 대선배들 틈에서 주눅이 들 법도 한 2001년생 김지찬과 2000년생 박승규, 원태인 등이 소리를 지르며 더그아웃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도 허 감독의 작품이다.

허삼영 감독은 “야구는 즐겁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며 “더그아웃의 좋은 에너지가 필드에 있는 선수들에게 전해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구원 투수들은 따로 휴식을 취하다가 불펜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은데 삼성 불펜 투수들은 보통 3~4회까지 더그아웃에서 머문다. 동료들과 함께 응원을 하기 위해서다. 허 감독은 “벤치 싸움은 결국 기 싸움”이라며 “무관중 경기라 더그아웃의 응원이 타석이나 수비로 나가 있는 선수들에게 잘 들린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삼성은 최근 10경기에서 8승2패를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선발 후보로 꼽혔던 벤 라이블리와 부상을 당하기 직전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던 타자 타일러 살라디노 없이 이뤄낸 성적이란 점이다. 더구나 주전 유격수 이학주도 4일 복귀 전까지 1주일가량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승부하는 삼성 야구가 튼튼한 잇몸으로 빛났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삼성 야구다.

[장민석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