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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푸틴으로부터 6000㎞… 러시아 극동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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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롭스크 등 10여개 도시 20여일째 "푸틴 물러나라" 시위

러시아 극동(極東) 하바롭스크시 레닌 광장 인근에 1일(현지 시각) 시위대 1만명이 모였다. 비가 오는데도 '푸틴 없는 러시아' '안티 푸티니즘' 등 팻말을 들고 "푸틴은 사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서슬 푸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치하에서 이례적인 일인데, 이 시위는 지난달 11일부터 매일 벌어지고 있다.

조선일보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 반정부 시위 현장에서 지난달 25일 한 참가자가 '푸티니즘'(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주말엔 시위 규모가 커진다. 지난달 말엔 9만여명이 모였다. 2018년 1월 유력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대선 출마 자격이 박탈됐을 때 수도 모스크바 등에서 열린 반(反)정부 시위 참가자가 1만5000명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규모다. 하바롭스크뿐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 10여 도시에서 비슷한 시위가 벌어진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러시아가 소련 붕괴 이래 최대 규모 반정부 항의 시위에 직면했다"고 했다.

모스크바에서 6000여㎞ 떨어진 극동 지방은 그동안 반정부 시위 무풍지대였다. 무엇이 동토(凍土)의 땅 극동에 반정부 시위의 불을 질렀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푸틴이 지난달 9일 과거 살인 사건 연루 혐의를 뒤집어씌워 세르게이 푸르갈 하바롭스크 주지사를 체포한 뒤 전격 해임해 버린 일이다.

목재·고철 무역상 출신인 푸르갈은 야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2018년 여당 현역 후보를 꺾고 주지사에 당선됐다. 자신의 급여를 삭감하고 관용 요트 매각을 지시하는 정책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자유민주당은 작년 하바롭스크 지방 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고 푸틴 여당은 36석 중 단 2석 확보에 그쳤다. 국제 외교안보 싱크탱크 카네기 모스크바센터가 "러시아 연방 탄생 후 처음으로 여당이 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푸르갈 해임만으론 한 달 가까운 시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푸틴은 집권 후 줄곧 '강한 러시아'를 표방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에 사는 180여 민족을 강력하게 통제할 견고한 중앙 집권 체제를 푸틴은 원했다. 그는 2000년 취임 첫해 지방자치단체장 해임권을 대통령에게 법률로 부여했다. 지방 세원이었던 부가세를 연방 세원으로 귀속시키고, 천연자원 채굴세도 연방에 편입하는 등 재정 권한도 상당 부분 거둬들였다.

푸틴의 중앙 집권 드라이브 20년간, 극동 등 지역 경제는 침체했다. 러시아연방통계청에 따르면 러시아 영토 3분의 1을 차지하는 극동이 러시아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년 넘게 4~6%에 그치고 있다. 최근엔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주민 삶은 더 팍팍해졌다. 푸틴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한 지난달 개헌 국민투표에서 하바롭스크의 찬성률이 62%로 전국 평균(78%)보다 낮은 이유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방 재정과 자원을 틀어쥔 모스크바의 식민주의적 태도가 낙후된 지방 주민들의 분노를 쌓았다"며 "이 오랜 불만이 극동 시위를 통해 분출하고 있다"고 했다.

자타공인 스트롱맨 푸틴은 그간 반정부 시위를 '서방에 물든 대도시 특권 엘리트층의 소동'으로 몰아 진압해왔다. 그러나 지방민이 중심인 극동 시위엔 푸틴이 꺼낼 카드가 마땅찮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푸틴 행정부는 극동 시위 발발 초기, 2024년까지 극동 개발을 위해 2조루블(약 32조원) 이상을 투자하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했지만, 도리어 시위 규모가 더 커지는 등 진정 효과가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타임스 등 현지 언론들은 푸틴이 당장 강경책을 택해 민심을 자극하기보단 소수 극렬 시위자들 진압에 주력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지난달 29일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에 "상황이 안정되길 바라고 있다"면서도 "하바롭스크를 비롯해 모든 지역은 대통령의 시야에 있다"며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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