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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토)

'53세5개월10일'…흰머리·주름 달고 최고령 기록 쓴 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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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5개월 10일' 미우라, 5일 르방컵 출전

격한 태클, 다이빙 헤딩으로 분위기 끌어올려

"젊은이들과 경쟁 덕에 매일 싸울 수 있다"

5일 저녁 일본 프로축구 르방컵(J리그컵) 경기가 열린 사가현 도스 스타디움. 전반 30분 반백(半白) 머리, 주름 가득한 얼굴의 원정팀 노장 스트라이커가 날렵하게 몸을 비틀며 헤딩을 시도했다. 골키퍼가 넘어지면서 막아내 골은 무산됐지만, 양팀 통틀어 처음 나온 위협적인 장면이었다.

이 순간 득점 실패에 하늘을 쳐다보며 아쉬워하는 그에게 적지(敵地)인 도스 스타디움의 홈팬들이 박수를 보내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공격수는 1967년 2월 26일생으로, 이날 만 53세 5개월 10일 나이를 기록한 요코하마FC의 미우라 가즈요시(三浦知良). 반 백살 나이에 몸을 던져가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에게 경의를 느끼는 건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었다.

조선일보

53세 5개월 10일 나이로 르방컵 경기에 출전한 미우라 가즈요시 /J리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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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는 이날 출전으로 르방컵 역대 최고령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 2017년 쓰치야 유키(1974년생)가 세웠던 만 42세 10개월 기록을 10년 이상 늘려놨다. 르방컵은 일본 축구 정규리그인 J리그, 각국 축구협회컵에 해당하는 일왕배와는 별도의 대회다. 그는 이전에도 ‘고령 타이틀’로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2017년 3월 J리그 2부에서 골을 넣어 세계 최고령 득점기록(정규리그)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일왕배 최고령 출전기록도 그의 것이다.

하지만 최근 1년 동안은 공식전에 나선 적이 없었다. 나이도 나이인데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리그도 중단됐다. 그러다 재개 이후 팀이 최근 4경기 연속으로 패배하자 요코하마FC 시모타이라 다카히로 감독이 분위기 반전을 위한 히든카드로 그를 뽑아들었다. 사간 도스전 당일, 미우라가 포함된 요코하마FC의 선발 라인업이 공개되자 일본 스포츠 전문지뿐 아니라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 신문까지 인터넷 속보를 보내며 흥분했다. 주장 완장을 차고 나온 미우라는 시작하자마자 거친 태클을 날려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경기 후 “동료들 전원에게 투쟁심, 기합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후반 18분 미우라가 교체된 이후 동료가 추가 시간 극적인 골을 넣어 요코하마FC가 1대0으로 이겼다. 5경기 만에 연패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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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세 5개월 10일 나이로 르방컵 경기에 출전한 미우라 가즈요시 /J리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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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이후 1년 만에 공식전에 나와 승리를 이끈 미우라가 영웅으로 떠올랐다. 인터넷에선 ‘미우라는 코로나로 우울한 분위기 속에 희망을 주는 선수’ 같은 감상도 나왔다. 일본 최대 부수 발행지인 요미우리 신문은 체육면 외에 사회면까지 할애해 미우라의 출장 소식을 다뤘다. 그는 신문에 “힘든 시간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데, 관객분들 앞에서 축구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미우라는 일본 대표로 89경기에 출전해 한국 축구팬들에게도 얼굴이 잘 알려진 선수다. 브라질 유학파 출신으로 골을 넣고 ‘가즈 댄스’라 불리는 삼바 춤을 추는 모습 때문에 이름을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지금은 은퇴한 최영일이 과거 한일전에서 미우라를 전담 마크했던 장면도 한국 축구팬들 뇌리에 깊숙이 남아있다. 1966년생으로 미우라보다 한 살 많은 최영일은 지금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미우라는 35년째 ‘현역’ 생활 중이다.

경이로울 정도의 롱런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기계 같은 자기 관리와 승부욕 덕이라는 게 일본 축구계의 분석이다. 그는 ‘선발 출전’이란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시즌 전 괌을 찾아 다른 선수보다 몇 개월 먼저 운동을 시작한다. 시즌 중엔 연습 시작 2시간 전에 훈련장에 나와 가장 늦게 돌아간다. 훈련 후엔 어떤 일이 있어도 냉·온수 교대욕 등으로 몸을 치료한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술을 마시는 일은 없다.

물론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50대 선수를 프로 경기에 출전시키는 건 ‘억지 영웅 만들기’란 지적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요코하마FC 시모타이라 감독은 “53세에 계속 달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존경할 만하다. 뛰어난 존재감으로 팀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비판을 일축했다. 5일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미우라에게 달려가 안긴 세누마 유지는 “미우라 선수가 기회는 온다고 계속 격려해줘서 정말 감사했다”고 했다.

미우라는 일본 매체 인터뷰에서 “나이 때문에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 걸 알지만, 난 골을 넣어 팀에 공헌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다. 젊은이들과의 경쟁, 그것을 향한 열정이 있는 한 매일 싸울 수 있다”고 했다.

[도쿄=이태동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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