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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친환경 에너지 대세에 코로나 팬데믹까지 ‘엎친데 덮친격’ [이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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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 악재’에 위기의 정유산업

국내 정유 ‘빅4’ 상반기 적자 5조 최악

OPEC조차 “코로나 끝나도 회복 못할 것”

정제 마진 배럴당 0弗… 수출하면 손해

내수수준으로 몰락한 日전철 우려 커져

올해 국제 석유시장은 태동 이래 가장 다이내믹했던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석유에너지는 신기후변화체제에 따른 에너지전환 움직임이 가속화하면서 주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에 의문이 제기됐다. 이 와중에 전 세계로 확산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세계 석유시장과 석유에너지 패권을 직격했다. 일각이긴 하지만 “석유수요의 피크(정점)는 2019년이었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다. 관심은 우리 정유산업이다. 반도체·자동차·컴퓨터 등과 함께 주요 수출품목 1, 2위를 지키며 대한민국 경제의 버팀목이 되어준 산업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종식과 무관하게 장기적으로는 수출 기능을 상실하고 내수 대응 수준으로 몰락한 일본 정유업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까지 나온다.

세계일보

◆“고유가 시대는 끝났다”

“지금 하는 사업이 언제까지 유효할 것 같은가요.”

1998년 38세 나이로 SK 총수에 오른 최태원 회장이 던진 화두다. 당시만 해도 SK 주력사업들이 ‘땅 짚고 헤엄친다’고 할 만큼 돈을 벌던 때다. SK 관계자는 “총수가 으레 하는 말씀이려니 했지 공감하기는 힘든 분위기였다”면서 “그런데 20년도 안 돼 그 질문이 현실이 됐다. 다음 20년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GS칼텍스·현대오일뱅크·에쓰오일(S-OIL) 등 정유 4사의 상반기 적자는 5조원을 넘겼다. 맏형 SK이노베이션은 실적이 나온 상반기만 2조2149억원 적자가 쌓였다. 올해는 총 1조6000억원 손실을 낼 것이란 관측이다. 업계가 이전 역대 최악으로 보는 때는 2014년 4분기다. 산유국들이 셰일 패권을 놓고 가격하락 치킨게임을 벌여 국제유가가 급락했다. 이때 정유 4사는 재고평가 손실 등으로 1조1500억원 손실을 기록했다. 올해 상황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알 수 있다.

실적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수요’ 급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류 활동이 줄어들고 세계경제는 침체기에 빠졌다. 석유수요만 해도 2000년대 초반 하루 8000만배럴 수준에서 매년 1%씩 견고하게 성장하며 2019년 1억배럴을 돌파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예측한 올 수요는 9059만배럴 규모. 작년대비 9%가량 감소한 수치다. 20년을 지속해온 추세가 전염병으로 단번에 역전돼 1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간다.

글로벌 컨설팅 그룹 맥킨지는 최근 보고서에서 “석유수요는 2030년 정점을 찍고 이후 환경은 점점 악화할 것”이라며 “정유·가스업계가 그간 겪은 압박은 앞으로 예상되는 것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OPEC조차 ‘원유수요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가능성을 심도 있게 검토 중’이란 보도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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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성 기준인 정제마진도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배럴당 최소 4달러는 돼야 팔고도 적자는 면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하지만 마진이 작년 말부터 급락하며 0달러를 오르내리고 있다. 수요가 급감해 팔 수도 없지만 팔아도 손해이고 장기계약한 원유는 계속 들어와 보관할 곳을 찾느라 비용을 늘리는 악순환이다. 그나마 유가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1분기 대규모 손실의 주범이 됐던 재고평가 손실은 완화됐다.

업계는 유동성 위기를 호소하며 수조원대 유류세 납부를 추가 유예해줄 것을 요구하는 등 정부 도움을 바라고 있다. 다만 정부는 손을 선뜻 내밀지는 않는다. 코로나19가 전 산업을 강타한 데다 ‘일자리 보호’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장치산업인 정유업은 밀린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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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곳 사라지는 산업환경이 진짜 위기”

업계 속내는 한두 해 실적보다는 급변하는 산업환경에 더 초조하다. 그중에서도 친환경 에너지전환 조류가 가장 화급하다. 관련 규제에 가장 취약한 업종을 꼽으라면 단연 정유·화학업이다. 미래 생존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이 실적 쇼크보다 더 큰 스트레스다.

SK이노베이션의 ‘그린밸런스 2030’, LG화학의 ‘2050년 탄소중립 성장’ 선언은 이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기존 투자를 거둬들이는 결정도 나온다. 현대오일뱅크는 원유정제시설(CDU) 증설 투자를 보류했고 대림산업은 5년간 2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던 미 석유화학단지 개발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미국 최대 독립 정유사인 마라톤페트롤리움은 최근 정유공장 2곳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위기는 중국발이다. 중국은 2018년 기준 우리의 석유제품 수출 963억달러 가운데 300억달러를 차지한 최대 수출시장이다. 그런 중국이 수요를 자체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정부 지원과 함께 정제시설을 현대화, 대형화하고 있다. 산유국인 중동도 같은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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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공급’ 과잉을 더욱 악화시킬 전망이다. 지난 4월 OPEC+20개국은 유가 하락세를 저지하기 위해 하루 970만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사상 최대 폭이었지만 유가는 같은 달 20일 초유의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73년의 1차 오일쇼크가 5% 감산 선언의 후폭풍이었는데 22.8%를 감산하기로 하고도 유가 급락을 막지 못한 것이다. 세계 석유 생산능력의 잉여가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일본식 구조조정 시나리오도 언급한다. 일본은 한국의 도전에 경쟁력을 상실하며 17개까지 난립하던 정유사를 5개로 재편, 내수와 화학산업의 원료를 공급하는 필요 최소한의 수준으로 구조조정했다. 물론 이 같은 정부 주도형은 우리 현실과 거리가 있다.

다만 정부가 정유업을 세원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급격한 시장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맥킨지는 “정유·가스업계 승자는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를 이용해 대담하게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는 기업이 될 것”이라며 “그렇지 않은 기업은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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