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19 (금)

초미니국가 '허트강 공국' 50년 통치, 코로나19로 막 내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경향신문

1998년 부인 셜리 공주와 함께 찍은 레너드 캐슬리 왕자의 사진. 게티이미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호주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서쪽 끝에는 자칭 독립국인 ‘헛리버(Hutt river) 공국’이 있다. 이름은 근처를 흐르는 허트강에서 따왔고, 면적은 7500㏊로 마카오의 두 배가 넘는 정도다. 주민은 30명 정도인데, 5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초미니국가는 자체 여권·화폐·우표를 기념품으로 팔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색 관광지로 사랑받았던 나라 속의 나라, 헛리버 공국이 지난 3일(현지시간)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관광객 발길이 끊기면서 늘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호주로 편입을 선언했다.

헛리버 공국이 생긴 때는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지역에서 4000㏊ 규모의 밀 농장을 운영하던 레너드 캐슬리는 1969년 주 정부가 폭락한 밀값을 끌어올리려고 ‘밀 판매 할당제’를 실시하자 반발했다. 캐슬리는 자기 농장 밀 생산량의 500분의 1밖에 판매량을 할당받지 못했다. 지역 의원을 찾아가 어려움을 호소했다가 “호주 시민이라면 호주 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발한 생각을 냈다. 호주 시민이 아니면 꼭 호주 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1970년 4월 자신의 농장에 ‘헛리버 왕국’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초대 왕이라고 주장했다. 빨간 망토를 두르고, 왕국 문양도 고안했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법망을 피해가는 수완에도 능했다. 어느날 헛리버 왕국을 공국으로 바꾸고, 자신의 지위도 왕에서 왕자로 격하시켰다. 그러더니 헛리버 공국이 영국 연방 소속이라면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에는 영국 연방 국가의 고위 관계자에게 위협을 가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1495년의 ‘영국 반역법’이 있다. 그는 호주에서 독립한 자신이 이 법의 보호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헛리버 공국은 호주와 영국 정부를 포함한 다른 어떤 국가에서도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1977년에 호주 정부가 세금을 추징하자 레너드 왕자는 호주에 전쟁을 선포하며 납세를 거부했다.

헛리버 공국은 독자적인 여권과 화폐를 발행하고 자국 우표를 제작하는 등 국가의 틀을 갖추면서 이색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이 지역에 들어선 관광객들은 레너드 왕자의 친족인 자칭 ‘로얄 패밀리’ 중 한 명의 환대를 받으며 2.5달러를 내고 입국 비자를 발행받는다. 마을에 들어서면 캐나다 예술가가 새긴 레너드 왕자 1세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여권에 ‘헛리버 공국’ 도장을 받는 것도 관광객에겐 색다른 경험이다. 화폐나 우표 같은 기념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 헛리버 공국 달러는 호주 달러와 1 대 1 비율로 살 수 있다.

하지만 50년 역사를 자랑하던 헛리버 공국은 지난 1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국경을 폐쇄했다. 레너드 왕자가 지난해 2월 향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215만달러의 세금 고지서를 남겼는데,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그레미 캐슬리 왕자는 빚을 갚을 여력이 없었다. 그레미는 코로나19로 관광 수입도 끊기기면서 호주로 편입을 선언했다. 그레미는 4000㏊에 달하는 땅 일부를 팔아 세금을 낼 계획이다.

그레미는 “아버지가 50년 동안 공들인 곳의 문을 닫아야 해서 매우 슬프다”면서 “추억이 참 많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우리들의 천국’ 초미니국가, 한 번 만들어 볼까

김윤나영 기자 nayoung@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