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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푸틴 딸도 맞았다는 러시아 백신…"맹물보다 조금 나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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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속도 내야하지만 안전과 타협 안돼"

필리핀 두테르테는 "러시아 백신 믿는다"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등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에 대해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의 전문가들이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임상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3상이 생략됐고, 1‧2상 데이터도 과학지에 발표되지 않는 등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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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개발해 승인한 코로나19 백신. 임상시험 최종 단계인 3상을 거치지 않아 논란이 일고 있다.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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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러시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전염병‧미생물학 센터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V'의 사용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스푸트니크V'는 1957년 구소련 시절 세계 최초로 우주에 발사한 인공위성 이름에서 따왔다. 러시아는 이 백신을 대량 생산해 일반인에게 접종할 계획이다.

푸틴 대통령은 백신이 “필요한 검증 절차를 거쳐 승인됐다”며 자신의 딸도 접종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발표 직후 러시아가 ‘세계 최초’ 타이틀을 얻기 위해 안정성과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상용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왔다.



英 전문가 "설익은 백신, 코로나 백신 전체 신뢰도 훼손"



오히드 야쿱 영국 서섹스대 과학정책연구단 박사는 11일(현지시간) 더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백신이 “반쪽짜리”이며 “맹물보다 나을 게 없다”고 일갈했다. 시험 단계가 생략되고, 관련 정보가 베일에 싸인 채 등록을 서두르다 보니 안전성과 효과 모두 보장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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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코로나19 백신 관련 보고를 받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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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푸틴 대통령이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도록 시험이 생략됐다”면서 다른 나라들은 이런 '선심성 백신 민족주의'에 휘말리지 않길 바란다고도 했다.

그는 특히 3상 임상을 건너뛴 점을 문제로 꼽았다. 야쿱 박사는 “현대 의학에서 (상용화 전에) 3상 시험을 건너뛰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전했다. “우리는 이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코로나19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물보다 나을 게 없는 백신이 사람들에게 접종되는 상황에 처했다”고도 했다.

백신은 보통 3단계의 임상 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효과를 검증한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3상은 수만 명을 대상으로 백신 상용화 가능 여부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단계다. 하지만 러시아의 백신은 이달 초까지 2차 시험을 마치겠다고 밝혔을 뿐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알렉산더 긴즈버그 가말레야 연구소장은 "3상 시험을 계속하면서 접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3상 시험을 마치지 않은 점을 인정한 셈이다. 또 1·2상에 대한 결과 데이터도 과학지에 발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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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 연구원이 백신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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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쿱 박사는 투명하지 않은 개발 과정도 우려했다. “비밀스러운 러시아 문서들이 백신을 어떻게 개발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거의 공개하지 않고 있다”면서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급조된 백신’이 해당 백신은 물론이고, 코로나 백신 전체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다고 비판했다. 또 이 백신의 등장이 더 나은 약품(백신) 시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도 했다. 백신 개발에 속도 경쟁을 붙여 안전성이 담보되지 않은 다른 백신이 또 나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야쿱 박사는 끝으로 러시아 백신이 효과가 없어도, 있어도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이 백신이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사람들에게 백신 안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반대로 이 이 백신이 널리 퍼질 경우 더 나은 백신이 나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재앙 초래할 수도" "상황 돌이킬 수 없게 악화시킬 수도" 경고 잇따라



다른 과학자들 역시 러시아 백신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수와 발루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유전학연구소 교수는 러시아 백신에 대해 "무모하고 어리석다”면서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대량 접종하는 건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러시아의 백신 접종은 어떤 면에서든지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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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을 들어보고 있는 러시아 연구원.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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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알트만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면역학 교수도 “안전성과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백신 접종은 현 상황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키는 ‘부수적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며 우려했다. 키스 닐 노팅엄대 교수 역시 "러시아 백신의 제조방법, 안전성, 효과 등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논문이 나오기 전까진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산제이 굽타 CNN방송 의학담당 기자는 11일 방송에 출연해 “(러시아) 백신에 대해 확보된 데이터가 없고,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맞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가 에볼라 백신을 개발하던 때가 생각난다면서 당시 3상 임상시험 결과를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지금 상황이) 러시아의 과거 백신 개발과 아주 비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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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개발해 세계 최초로 승인한 백신.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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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 소장은 11일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란 사실을 확실히 입증했으면 한다”며 입증단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파우치 소장은 러시아가 ‘세계 최초’라고 강조하는 부분을 지적하며 “우리에게도 6개 이상의 백신 (후보 물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사람들에게 해가 되고, 효과가 없다는 가능성을 감수하면서도 접종하겠다면 다음 주에도 이를 시작할 수 있다”며 “하지만 그런 식으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美 "중요한 건 최초 아냐" … 두테르테 "러시아 신뢰"



미국과 독일은 정부 차원에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내놨다.

앨릭스 에이자 미국 보건복지부 장관은 11일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것은 최초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중요한 것은 미국과 전 세계인들을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신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란 것을 보여주는 3상 임상 데이터”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미 식품의약국(FDA) 기준에 맞는 수천만 회분 백신을 개발 중이며 2021년 초까지는 백신이 준비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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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러시아 연구원이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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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도 러시아의 백신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독일 보건부 대변인실은 현지 매체 RND와의 인터뷰에서 “환자 안전이 최우선사항”이라면서 “러시아 백신은 품질이나 효능, 안전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날 러시아와 긴밀하게 접촉해 백신의 사전 자격인정 절차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타리크 자세레빅 WHO 대변인은 “백신의 사전 자격인정 절차에는 임상시험 결과에서 나오는 안전성과 효과 자료에 대한 엄격한 검토와 평가가 포함돼 있다”면서 “WHO는 모든 백신 후보물질에 대해 이런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여러 백신 후보물질이 개발되는 속도에 고무돼 있다”면서도 “절차에 속도를 내는 일은 안전과 타협한다는 뜻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반면 12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10일 밤 TV연설을 통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코로나 백신 무상 공급을 제안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푸틴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연구에 엄청난 신뢰를 갖고 있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러시아가 생산한 백신은 인류를 위해 정말로 좋은 일”이라면서 “백신이 도착하면 내가 첫 시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서 시진핑 국가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필리핀이 먼저 코로나19 백신을 획득하거나 구매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의 백신 승인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거세게 일자 러시아는 “근거 없는 비판”이라며 반박하고 나섰다.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미하일 무라슈코 러시아 보건부 장관은 12일 “외국의 동료들이 경쟁심과 러시아 제품의 경쟁력 우위를 느끼면서, 우리가 보기에 전혀 근거 없는 견해들을 밝히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러시아 백신은 일정한 임상 지식과 자료를 확보한 것”이라며 백신 승인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무라슈코는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제품(백신)은 내부 수요에 쓰일 것이다. 우리 국민의 필요를 먼저 해소해야 한다”며 러시아 백신의 접종 계획을 밝혔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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