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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목)

[뷰엔] 이 쓰레기들은 모두 '헌옷수거함'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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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버린 맥주캔, 과자 찌꺼기,
곰팡이 핀 점퍼, 재활용 안되는 솜이불까지...
'쓰레기통'으로 전락한 헌옷수거함 천태만상

한국일보

서울 도심 내 헌옷수거함들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빗발치는 인근 주민들의 민원에 구청도 만성적인 몸살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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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 내에 가득한 쓰레기들을 골라내 처리하는 것은 모두 수거업체 직원들의 몫이다. 업체 직원들의 트럭 한 켠엔 아예 ‘쓰레기 분리수거용 봉투’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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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부터 단단히 착용하시죠.”

장맛비가 이어지던 지난 7일 오전, 서울 시내 한 주거지역에 설치된 헌옷수거함을 열자 쿰쿰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축축하게 젖은 검은색 비닐봉지 안엔 찌그러진 캔이 가득했고, 먹다 남은 맥주가 과자 부스러기와 섞여 시큼한 냄새를 뿜어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양반이네요. 봉지 밖으로 안 흘렀으니 천만다행이죠. 얼마 전 수거함 안에서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터져서 헌옷을 죄다 버린 적도 있어요.” 이 일대에서 헌옷수거함 150여개를 관리하는 A 의류재활용협의회 직원 박모 씨가 헌옷더미에서 쓰레기를 척척 골라냈다. 박씨의 트럭 한쪽엔 쓰레기 수거용 봉투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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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 주변은 언제나 불법 투기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일회용 용기, 종이 상자, 스티로폼 등 포장재 쓰레기들이 잔뜩 뒤섞여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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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용이 가능한 의류, 잡화를 모으는 헌옷수거함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각종 폐기물은 물론, 동물 사체까지 몰래 버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수거대상이 아닌 침구류도 거리낌 없이 버린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관리주체의 도움을 받아 서울 시내 헌옷수거함 30여개를 열어 보니, 거의 모든 수거함에서 과자봉지나 빈 생수병, 사탕껍질, 휴짓조각 등 쓰레기가 나왔다. 심지어 썩은 고기와 젖은 수영복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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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 바로 옆으로 인근 주민들이 투기한 생활 쓰레기들이 한가득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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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은 관할 구청이 공개입찰 방식으로 수거 주체를 선정해 관리한다. 주로 지역 재활용업체나 장애인단체 등이 선정되는데, 수거된 헌옷은 중개상을 통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로 수출돼 왔다. 그러나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1kg당 가격이 지난해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여기에 더해 수거함에 쌓인 쓰레기까지 처리해야 하다 보니 관리 주체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악취와 오염으로 인한 주민 민원까지 빗발치면서 구청도 만성적인 몸살을 앓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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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이 되지 않는 라텍스 소재의 베개와 바퀴 달린 여행용 가방. 종량제 봉투에 넣거나, 신고필증을 붙여 버려야만 하지만, 헌옷수거함에 넣어놓는 경우가 많다. 공원 인근 헌옷수거함에서 나온 검은 봉지 안엔 맥주캔과 과자봉지 등 쓰레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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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은 음식물 쓰레기다. 수거일에 맞춰 집 앞에 놓아두어야 할 음식물 쓰레기를 헌옷수거함에 몰래 넣는 이들이 적지 않다. “요즘 같이 덥고 습한 날씨엔 음식물 쓰레기가 더 빨리 썩어요. 당장 내 집 앞의 악취가 싫어서 그러는지... 비가 그칠 때마다 부지런히 돌면서 살펴보는 수밖에 없죠. 하루 이틀만 지나도 벌레가 꼬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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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 우산, 장난감 등 잡다한 생활 폐품들을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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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은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그 안에는 낡은 장난감부터 쓰다 남은 크레파스, 끊어진 이어폰, 때 탄 운동용 매트, 전기장판 등 처치 곤란한 물건들이 수북했다. ‘6세용, 작동 잘 됩니다’라는 메시지가 붙은 장난감도 보였다. ‘쓸모 있는 물건이니 누구든 가져가라’는 취지이나 헌옷수거함은 ‘기부 물품 수거함’이 아니다. 박씨는 "어쨌든, 여기 넣으면 원칙적으로 다 폐기물”이라고 했다. 수거함 외부에 수거 가능 품목과 그렇지 않은 품목이 자세하게 표시돼 있지만 양심을 속이기로 마음먹은 이들에겐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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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수거업체 직원의 작업용 트럭, 언뜻 보기에 ‘이불장수'가 따로 없다. 반나절 사이에 쌓인 이불만 무려 8채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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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 곳곳에는 비닐봉지에 쑤셔 넣은 커다란 솜이불 통째로 버려져 있다. 수거업체 직원은 능숙하게 이불이 담긴 봉지를 거꾸로 들고 안에 고인 누런 빗물을 빼낸 다음, 흠뻑 젖은 이불을 빼내 트럭 위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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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거함 관리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침구류’다. 충전재로 속을 꽉꽉 채운 이불이나 라텍스가 들어간 베개, 인형 등은 ‘의류’가 아니므로 종량제 봉투에 담아 배출해야 한다. 그런데도 비좁은 수거함 입구로 꾸역꾸역 밀어 넣다 보니 정작 의류를 넣으려는 이들은 더 이상 여유 공간이 없는 수거함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보세요, 트럭에 실은 물품 중 20% 이상은 사실상 그냥 버려야 하는 물건들이에요.” 이날 박씨와 함께 살펴본 수거함 30여개에서만 솜이불 16채, 베개 14개, 대형인형 5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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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바퀴, 지저분한 목장갑, 등판 전체에 커다란 곰팡이가 슬어 있는 점퍼, 삭아버린 가방까지 나온다. 심하게 썩어버린 옷들은 주변의 다른 옷들까지 오염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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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낡아 모서리 부분이 삭아 버린 운동용 가방, 도저히 다시 쓸 수 없는 물건들은 쓰레기 봉투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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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거 가능 품목이지만 사실상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들도 적지 않다. 등판 전체에 곰팡이가 슨 점퍼, 너무 낡아 모서리가 삭아 버린 가방, 짝 잃은 신발들은 전부 쓰레기 봉투로 직행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방자치단체의 고민도 깊다. 최근 2~3년 사이 적지 않은 자치구가 난립하던 사설 업체를 정리하고 수거함 외관 디자인도 정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쓰레기 투기 문제만은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결국 종로구는 헌옷수거함 개수를 절반가량으로 줄이기 시작했고, 강서구는 상태가 좋지 않은 수거함을 아예 철거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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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거업체 직원 박씨가 헌옷수거함 인근에 떨어져 있는 담뱃갑을 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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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옷수거함이 애물단지로 전락했다고는 하나 철거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수거하는데 그 때마다 입구 부분까지 그득그득 차 있어요." 박씨의 말대로 헌옷수거함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처리하기 번거로운 쓰레기를 몰래 버리는 몰양심으로 인해 누군가에 요긴한 재활용 수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날 수거작업을 마무리하던 박씨는 “‘나 하나쯤이야’하는 생각으로 모인 그 ‘하나’들이 쌓이면 수십, 수백 개의 쓰레기 산이 된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전윤재 인턴기자 younj0705@naver.com
서현희 인턴기자 sapiens01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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