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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예측하는 것인가, 믿고 싶은 것의 실현인가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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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예보 그리고 정보의 참과 거짓

[경향신문]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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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늘을 기반으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아내려는 ‘투영의 동물’

먼 훗날 우리는 2020년의 하늘이 무슨 색깔이었다고 기억할지 한 번 생각해보았다. 미세먼지로 인한 잿빛의 봄하늘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며 새해를 맞았더니 곧바로 코로나19로 공장들이 멈춘 때문인지 파란 봄 하늘이라는 난데없는 호사를 누리나 싶었는데, 곧 휴전선 이남 최북단인 임진강 필승교 물 높이가 사상 최고를 기록할 정도로 끝없는 비 때문에 내리쬐는 햇빛으로 파래야 할 여름날 하늘이 잿빛이 되고야 말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기상청에서 내일 비가 온다고 하면 안 오고, 안 온다고 하면 온다고 하면서 도대체 그 비싸다는 슈퍼컴퓨터를 갖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성토하고 있고, 한 술 더 떠서 어떤 사람들은 기상청의 예보를 정반대로 해석하면 맞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하고 있는데, 필자는 이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하고 있다. 기상청이 해가 난다고 하면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린다고 하면 해가 난다고 100% 정확하게 날씨를 예측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말이다.

사람은 내일의 날씨, 주가, 운수 등을 알고 싶어 한다. 사람은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오늘을 기반으로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알아내려는 투영의 동물(animals of projection)이기 때문이다. 맑은 날 멋진 옷을 입고 데이트하고, 가치가 오를 자산을 알아내어 부자가 되고, 귀인을 만나 행복을 찾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그런데 내일 날씨를 알고 싶은 욕망은 주식시장이라는 게 없던 고대부터 존재해온 제일 오래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기우제라는 미신적 예식을 통해 하늘 위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호소할 정도로 날씨는 예측하기 어렵고 사람을 절박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이렇게도 중요하고 오래된 문제인데 왜 현대 과학의 위대한 성과인 슈퍼컴퓨터를 갖고서도 우리의 날씨 예측력은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까?

과학기술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한다. 그러므로 날씨 예측이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뜻이다. 사실 오만가지 방향으로 불어대는 바람과 바닷물의 온도 변화 등이 모두 요인이 되어 만들어지는 날씨는 자연에서 제일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현상이다. 어제와 오늘은 날씨가 비슷했는데 내일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는 일이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이처럼 우리가 쉽게 느끼지 못할 정도의 사소한 물리적 상태의 변화가 전지구적으로 큰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에서는 흔히 ‘서울에서 나비가 펄럭이면 런던에 폭풍우가 올 수 있다’(서울과 런던 대신에 아무 도시 이름이나 넣어서 써먹으면 된다. 단,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극적인 효과는 상승한다)고 표현하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라고 하는데, 그만큼 날씨 예측은 어렵기에 우리는 지금도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는 기상청발 정보 한 조각을 두고서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하는 오래된 고민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공포·욕망을 ‘물음’을 통해 세상에 던지고
그것에 답이 되어주는 ‘정보’를 갈망하는 존재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휴가를 망쳐 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을 독자들을 위해 날씨 얘기는 그치고, 여기에서는 위에 나온 ‘정보’라는 것의 개념 그리고 ‘정보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일단, “내일은 비가 온다”는 정보는 내일 날씨에 관심이 없는 사람(별난 사람이긴 하지만, 세상은 별난 사람들 천지다)에게는 무의미한 것인데(혹시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한 경험을 기억해보자. 그 사람이 고마워하던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라고 하는 것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알고 싶은 것은 달라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사는 것은 공통된 것이다.

나는 커서 무엇이 될까요? 다음주 시험엔 어떤 문제가 나올까요? 무얼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날까요?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희망, 공포, 욕망을 물음을 통해 세상에 던지고 그것에 대한 답이 되어주는 ‘정보’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인터넷이 실현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완벽한 정보’와
그 ‘전달’의 꿈…그러나 그것은 과연 ‘진실’인가

그런데 사실 ‘정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낱말을 꼽으라면 ‘인터넷’(The Internet)이 제일 많이 나올 것 같다. 인터넷은 1960년대에 정부 기관과 대학교들이 갖고 있던 컴퓨터들에 어려운 계산 업무를 분산하여 실행할 방법을 고안하기 위한 미 국방부의 연구 프로젝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인터넷이 사회에 끼칠 영향을 꿰뚫어본 1990년대의 젊은 기업가 빌 게이츠는 ‘당신 손가락 끝에 정보가 있다(information at your fingertips)’며 정보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풀릴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사실 완벽한 정보의 꿈은 50년을 더 거슬러올라가 클로드 엘우드 섀넌(Claude Elwood Shannon)이라는 수학자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최고 명문인 미시간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 출신으로 통신사 AT&T의 모태였던 벨(Bell)에서 일하던 섀넌은 사람의 말을 전화기 반대편 사람에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달해줄 수 있는 기술을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엔 신호가 설비의 오작동이나 날씨로 인해 유실되거나 왜곡되는 일에 대처하기 위해 신호를 세 번, 다섯 번,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보내는 방법이 일반적으로 쓰였는데, 이 방법은 오류에 대한 저항력은 생기지만 비용이 반복하는 횟수에 비례해 상승했다. 그러므로 ‘완벽한’ 정보 전송을 위해서는 신호의 무한 반복, 즉 무한한 비용이 필요하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섀넌의 제일 큰 업적은 이러한 선입견을 깨고 유한한 비용으로도 신호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이제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탐험가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든 그 어느 누구와도 완벽하게 통신할 수 있다는 것을 인류가 알게 되었고, 그러한 ‘완벽한 통신의 꿈’이 인터넷의 모습으로 형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섀넌으로부터 80년, 빌 게이츠의 선언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정말 ‘완벽한’ 정보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 섀넌 시대의 뭉툭하고 무거운 전화기와 숨막히게 선명한 영상을 한 순간의 막힘도 없이 즐기게 해주는 최신의 초경량 스마트폰을 비교해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보의 ‘본질’은 우리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는 위의 명제를 곱씹어본다면 정보의 ‘가치’ 또한 이러한 겉보기의 화려함보다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하는 ‘진실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섀넌이 살던 1940년대보다 더 좋은, 더 완벽한 정보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동안 발전해온 기술의 우수성을 자랑하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가 또는 지금의 사회가 과거보다 더욱더 진실된 정보를 추구하고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정보보다 허상을 ‘만들어’ 믿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는 ‘양심’

여기에서 필자는 정보의 진실성과 대중의 반응과 관련된 두 가지 구체적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2010년 멕시코만의 딥워터 호라이즌(Deepwater Horizon)이라는 유전 굴착 시설의 파손으로 인한 심해 원유 유출 사태 때 원유가 북상하는 허리케인에 빨려들어가는 바람에 미국 본토에 기름 섞인 비가 마구 내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사건이고, 또 하나는 2017년 서울의 시내버스에서 아이만 내리고 엄마가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버스가 출발하자 누리꾼들이 버스기사를 부주의했다며 공격했던 사건이다. 원유를 구성하는 분자들은 물보다 매우 무겁기 때문에 바람의 힘으로 바다에서 끌어올리지 못한다는 과학적 지식은 허리케인이 빗물과 함께 뿌린 기름기가 땅 위에 둥둥 떠다니는 영상이 퍼져나가는 사태를 못 막았고, 기계가 오작동했거나 버스기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실수일 수도 있다는 상식적인 대안 가능성들은 특정 직종 종사자의 실력과 직업의식에 대한 편견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그 지식이나 합리적인 대안 가능성에 기반해 그 대중의 오류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반대로 그 대중의 믿음이 더 공고해짐을 느꼈다. 이 둘은 객관적인 사실을 앞에 두고서도 자신들의 생각에 반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와 더 나아가 자신의 선입견에 반하는 것들이 오히려 자신의 선입견을 강화시킨다고 착각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현상의 사례인데, ‘열린 소통의 새로운 장’이라고 각광받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의 말은 흘려듣고 세상에서 제일 무지한 평생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싸우는 흔한 광경으로부터 이 현상들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혹시 사람들이 명쾌한 과학적인 사실(바람은 기름기를 머금지 못한다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단순한 논리력(아이가 버스에서 혼자 내린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러 가지라는 것)도 구사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를 혹시 사실만을 말하게 하는 약, 참·거짓을 감별해주는 기계를 만듦으로써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과학기술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발전한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최신, 최고의 과학기술로도 물리적인 현상에 불과한 날씨조차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과학의 역사는 놀라운 발견들로 점철되어 있으니까 저런 약과 기계가 진짜로 만들어졌다고 한 번 상상을 해보자.

자, 이제 스스로 진실을 말하는 양심을 갖거나 참·거짓을 알아내는 분별력을 가지려 애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사는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노력하지 않아도 이제는 모르는 것이 없고 틀릴 리가 없는 꿈의 세상이 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독재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역사상 수없이 많았고, 지금도 수없이 많고, 미래에도 수없이 많을 그런 사람) 나는 그 약과 기계를 독점한 다음 내 마음대로 변형시켜 스스로 진실을 추구할 의지를 잃어버린 인류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나의 말은 절대 진리이며 나의 행위는 절대선에서 나온다고 믿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적은 이 비가 그친 다음 드러날 맑은 하늘을 상상하듯이 참이 거짓을, 지식이 무지를, 양심이 부패를 이겨내는 미래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박주용 교수

경향신문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네트워크과학·복잡계과학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시스템스 생물학을 연구하고,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제주도에 현무암 상징물 ‘팡도라네’를 공동 제작·설치하였고, 대전시립미술관의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 X’에 큐레이터로 활동하였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창시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남는 시간에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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