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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감방 갔다와도… 反中 언론사주 "내 선택 안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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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反中투사' 지미라이

지난 10일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던 홍콩 빈과일보 지미 라이(黎智英·72)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난 당일인 12일 정오, 홍콩 동부 정관오 지역에 있는 신문사로 출근했다. 그가 편집국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박수를 치고 꽃다발을 건넸다. 그는 "홍콩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빈과(일보)는 분명히 버텨낼 수 있습니다. 어떤 압박을 받아도 모두 버텨내야 합니다. 각자 산을 오릅시다. 계속 오릅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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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우산혁명' 땐 시위 선봉에 -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 시위인 '우산 혁명' 당시인 2014년 9월 28일 홍콩 반중(反中) 매체 빈과일보의 지미 라이(가운데) 회장이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우산 혁명'뿐 아니라 2019년 홍콩 범죄자를 중국에 보낼 수 있는 내용의 범죄인 인도법 제정 반대 시위 때도 최전선에 섰다. 라이 회장은 지난 10일 홍콩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가 40시간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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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0일 홍콩 내 반중(反中) 세력을 감시·처벌하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된 후 체포된 사람은 알려진 것만 20명 가까이 된다. 하지만 라이 회장만큼 국내외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인물은 없다. 영미권에서는 그를 "홍콩 언론 자유의 상징"이라고 부르고, 중국 인민일보는 13일 "세기(世紀)의 매국노"라고 비난했다. 라이 회장은 홍콩 내 발행 부수 2위인 빈과일보의 창립자이자 모회사인 미디어그룹 '넥스트 디지털'사(社)의 최대 주주다. 홍콩보안법 위반, 선동(煽動), 불법 집회 조직, 참여 등 10여 가지 혐의에 대해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그동안 중국을 거세게 비판해온 그는 홍콩보안법이 시행될 때부터 체포 1순위로 꼽혀왔다. 법 시행 전인 6월 18일 AFP통신 인터뷰에서 "감옥에 갈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삶의 이력이 저항 의지의 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많다.

라이 회장은 1948년 중국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화물선 6척을 가진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한다. 1948년 광저우가 공산화되면서 부친은 홍콩으로 피신하고 어머니는 '노동 개조(사상 개조 목적으로 노역시키는 것)'에 보내졌다. 라이 회장은 5세 때부터 쓰레기를 주워 입에 풀칠했고, 암시장에서 라이터를 팔거나 광저우 기차역 앞에서 짐을 날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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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홍콩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빈과일보를 펼쳐들고 있다. 신문 1면 헤드라인에 "빈과는 반드시 버텨낼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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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가 되던 해, 그는 홍콩 돈 1달러를 들고 아버지가 있는 홍콩으로 밀항했다. 가발 공장, 의류 회사에 들어가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그는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다리에 힘이 풀려 소변을 보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981년 의류 브랜드 '지오다노'를 세웠다. 일하면서도 영어를 독학하고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비판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책장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여러 번 읽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기업인이었던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계기는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였다. 베이징 천안문에서 정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군이 총을 쏘자 홍콩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도 '내려오라. 우리는 분노했다'라고 적힌 티셔츠를 만들어 시위대에 나눠줬다. 1990년에는 잡지를 발행하며 언론 사업에 뛰어들었다. 리펑 당시 중국 총리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가 중국에서 의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지오다노를 매각했다. "장사꾼은 정권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언론에 '올인'하게 된 계기라고 한다. 1995년 빈과일보를 창간해 "아시아의 루퍼트 머독(월스트리트저널 등을 보유한 언론 재벌)"이라고 불렸다.

라이 회장은 홍콩 야당과 시민 단체를 후원해왔다. 중국 정부가 그를 "반중(反中) 세력의 돈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014년과 2019년 홍콩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 때는 시위대 맨 앞줄에 섰다. 스스로를 "트러블 메이커(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라고 부르는 그는 지면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판했다. 지난해 미국을 방문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을 만나 홍콩 문제를 논의했다.

라이 회장 체포를 계기로 지지자들은 빈과일보 지지 캠페인을 벌이고 회사 주식을 샀다. 하지만 신문 모회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1% 감소하고 영업 적자는 23% 가까이 늘었다. 반중 성향 때문에 기업들이 광고를 꺼리면서 신문 1면에 성인용품 광고를 싣고 있다. 홍콩보안법 수사 결과에 따라 회사 자산이 압류되고 막대한 벌금을 물 수도 있다.

라이 회장은 보석으로 풀려난 뒤 12일(현지 시각) 영국 BBC 인터뷰에서 "구속돼 있는 동안 '이런 시련이 닥칠 줄 미리 알았더라도 민주화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봤다.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결론이었다"고 했다. 13일 미 헤리티지재단이 주최한 온라인 세미나 연설에서도 "우리가 (중국을) 바꾸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는 없다"고 했다.

[베이징=박수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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