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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매경춘추] 허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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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난데없는 '소설론'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달구었다고 한다. 일상 화법에서 "소설 쓰시네" 하면 없는 사실을 지어낸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요즘 부쩍 사실을 적시한 소설이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저)과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저)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두 소설은 거의 논픽션처럼 읽혔지만 그렇다고 이른바 극적인 구성과 소설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다른 책들로는 '김지은입니다'(김지은 저)와 '경찰관속으로'(원도 저)가 있다. 둘 다 논픽션이지만 읽다 보면 이게 정말 사실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암담한 내용이 많다. 위로와 격려가 되는 부분도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앞의 책은 텍스트 구성에서 사안에 접근하는 (아마도) 편집자의 해석이 돋보였다. 도지사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을 별도 프린트처럼 끼워넣은 페이지 같은 게 특히 그랬다. '경찰관속으로'는 글의 내용이 주는 울림뿐 아니라, 매일매일을 견디고 쌓아가는 필자의 삶에서 글쓰기가 갖는 전방위적 효과가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두 책 모두가 일구어낸 성과는 무엇보다 꼼꼼하고 끈질긴 기록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흔히 시각적 픽션으로 간주되는 미술에서도 기록과 자료가 갖는 힘은 막강하다. 작가가 착상 단계에서 수집하는 레퍼런스는 물론이고 때로는 작품 속으로 직접 편집해 넣는 도큐먼트가 그렇고, 작품의 완성 이후 남는 다이어리, 문서와 장부, 사진, 드로잉, 모형 등 다양한 종류의 자료는 또 다른 작업을 촉발하는 리소스로 활용하기도 한다.

실물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 축적하는 체계를 뜻하는 아카이브는 이제 미술 기관의 필수적인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아카이브 전시와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작품도 흔히 보는 미술계 풍경이 됐다. 아카이브가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과거의 기록일 뿐 아니라 당대 작업 속으로 계속해서 현재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진화하는 디지털 프로세싱으로 인해 아카이브는 더 이상 소수가 접근하는 원본의 희귀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중의 동시 접속이 가능한 자원으로 재구축하고 있다.

니콜 크라우스가 쓴 소설 '어두운 숲'을 아껴가며 읽었다. 책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아카이브'를 이스라엘에서 발견했다는 설정이 나온다. 어둡고 지저분한 호더의 주택에서 가방에 담아 훔쳐낸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는, 비록 끝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지만, 존재 자체로 엄청난 상상의 무게를 갖는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혹은 위계를 다룰 때 아카이브는 미술의 허구적 힘을 구성하는 사실의 존재를 달구어내는, 일종의 문화다. 2021년 개관을 앞두고 있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를 나는 이런 문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산물로 해석한다.

[백지숙 서울시립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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