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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문화 이면] 1927년생 일본인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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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광복 75주년이다. 광복절도 이제 사람의 수명과 비슷하게 나이를 먹었다. 일제치하의 뼈아픈 36년의 경험은 이제 확실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1919년생인 나의 할아버지는 약관의 나이에 오사카로 건너가 기술을 배웠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할아버지는 대형 군함을 건조하는 공장의 용접반에 배치돼 용접일을 배우셨다. 귀국 후에는 자전거포를 차렸고, 한국전쟁 이후 리어카 몸체를 용접해서 납품하는 일로 돈을 벌기도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해방둥이로 1945년 4월 오사카에서 태어나자마자 한국으로 건너오셨다. 일본이 패망하지 않았으면 아마 좀 더 그곳에 살았을 것이다.

광복 이전 한국인이 일본에 끌려가고 배우러 갔듯, 일본에서는 삶의 기회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이들이 있었다. 최근에 내가 보고 있는 원고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나는 1935년에 발간된 '포항지(浦港誌)'라는 지방지를 향토사학 연구자가 옮기고 비판적 주석을 붙인 것이다. 당시 포항시장은 일본인이었고, 영일군수도 일본인이었다. 일제는 20세기 초반 포항으로 건너와 깡촌이던 그곳을 일약 중심 항구도시로 키워낸 일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겼다. 번역된 글을 읽고 있으면 포항을 딛고 서서 내륙과 해양을 오가는 큰 부를 꿈꾼 식민주의자들의 내밀한 욕망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경주는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 나의 원향(原鄕)'이다.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라는 여성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대구, 경주, 김천에서의 삶을 회고해 1984년에 일본에서 펴낸 책이다.

1927년생인 모리사키는 구순을 훌쩍 넘긴 나이로 죽기 전에 한국어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모리사키는 대구의 한 병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그 지역에서 다녔고 중학교는 경주, 고등학교는 다시 김천에서 다니다가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던 194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식민지 조선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다. 모리사키는 아버지로부터 그 죄의식을 물려받았다. 그녀에게 경주와 대구는 그리움이자 죄의식의 원천이다.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타 민족의 고통 위에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녀는 그 죄의식을 씻기 위해 탄광촌에 가서 광부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르포 작가가 된다. 또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경주에서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죽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갈수록 더해졌다. 모리사키는 유독 친절하던 조선인 아주머니들을 기억한다. 그 경상도 아지매들을 그녀는 '오모니'라고 부른다. 당시 아이들의 입에 걸린 말을 어린 모리사키가 따라한 것이다. 책의 제목에 나오는 어머니는 '오모니'이기도 하다. 오모니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의식이 평생 모리사키를 몸살나게 했다.

최근 이 두 권을 직접 교정을 보면서 한일관계에 있어서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봤다. 모리사키에게 죄의식은 곧 그리움이었다.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의 사람과 풍습에 인간적으로 스며들었던 과정이 없었다면 과연 그녀가 진정한 죄의식을 느낄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병상생활 말년에 머리맡에서 말동무를 해주던 한국 여자아이가 어른들에게 들은 일본 욕을 그대로 전하자, 한국에 있는 일본인에게는 절대로 그 말을 하지 말라며, 일본인들은 다 스파이라고 주의를 주던 조숙한 고등학생 모리사키. 그런 경험 없이 혹은 그런 경험과는 이제는 너무 멀어진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진정한 미안함의 정은 가능하기나 한 걸까.

반대로, 책과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일제의 잔혹함을 접했던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적개심도 그런 경험의 논리에서 보자면 너무 교과서적 관점에만 머무는 것은 아닐까, 여러모로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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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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